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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모하는 마음 (시 73: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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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의 마음은 늘 구하고 사모합니다 구하고 사모하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본성입니다. 살아있는 사람은 발전하기를 원합니다. 가난한 자는 부한 자가 되기를 원하고, 무식한 자는 많은 학문을 배우기를 원할 것입니다. 권세가 없는 자는 권세 있기를 원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 현재의 처지에 만족하지 않고 늘 더 나은 것, 더 좋은 것을 한없이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사모하는 것이 같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재물을 구하고, 어떤 이는 지혜를 구하고, 어떤 이는 권세있는 지위를 구하고, 어떤이는 안락을 구하고, 어떤 이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이는 지혜도, 학문도, 부귀도, 명예도, 지위도, 다 초개처럼 여기고 평생 시를 짓고 읊으면서 보내는 자도 있고, 혹은 미술로, 혹은 연극으로 평생을 보내는 자도 있으며, 흑자는 세상 모든 것을 초개처럼 내버리고 산 중에 들어가 해탈의 길을 찾는 자도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이 찾고 사모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세상은 살아갈 맛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만일 바라고 찾을 것이 없는 세상이라면 이세상은 사막보다 더 건조하고 살 맛이 없을 것입니다.

2. 현대인은 무엇을 구합니까 현대인들 대다수가 구하는 것은 삶에 대한 애착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잘 살아보겠다고 나름대로 목표를 정하고 필요한 것들을 찾아 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자기의 목표한 바를 찾기 위해 일생을 다바치는 중 다행하게도 찾은 자도 있으나 바라고 찾는 것을 얻지 못하여 인생을 마치는 자도 많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남부럽지 않은 큰 부를 얻은 자도 있고, 학문으로 성공한 자도 있으며, 예술로 명예를 얻은 자도 있으며, 사업에 성공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목표한 바를 얻었다고 해서 만족과 기쁨을 누린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참으로 행복을 소유했다고 하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그것으로 참 만족은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현대인은 빵을 구하다가 빵을 얻고나면 그 이상의 것을 찾아 다니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마음에는 언제나 원함만이 있을 뿐입니다.

3. 광야 같은 세상 사람은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동으로 가나, 서로 가나, 예나 지금이나, 한숨과 눈물과 고통이 끝나는 날은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 가면을 벗어 놓으면 고통 주머니입니다. 한 가지 얻으면 한 가지가 부족해서 고통입니다. 세상의 것을 다 얻는다해도 우리는 번민과 비애와 고통을 벗어나지는 결코 못할 것입니다. 행운아 괴테는 말하기를 “나의 전 생애 중에 진정으로 즐거운 날은 하루 밖에 없었다”라고 한탄했습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불태우고 승리의 기쁨 속에 있을 때도 흐느껴 울면서 인생의 허전함을 한탄했으며 마지막에 세인트 헤레나 섬 감방에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칼과 방패로 세웠던 나의 제국이 어디로 갔느냐” 하고 비통하게 탄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또 진시왕이 서산에 넘어가는 달을 호령으로 머물게 못하여서 비통에 잠겨 자신의 나약함을 탄식했습니다. 따라서 세상은 광야와 같이 적막하기만 합니다. 이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요

4.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요 1서 2:17에 “이 세상도 가고 정욕도 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세상에 있느니라”, 벧전 2:24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안목의 정욕도 지나고, 이 생의 자랑도 지나가고, 청운의 정열도 지나가고, 모든 쾌락과 행복이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지식도 가고, 예술도가고, 친구도 가고, 원수도 가고, 사랑도 가고, 마음도 가고, 이 모든 것은 잠시 있다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영원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입니다. 그렇기에 인간들의 마음은 유한한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영원한 것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시편 기자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1) 시 42:1-2에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주를 찾으려고 갈급하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으려고 갈급함과 같도다 내 마음이 하나님을 사모하기를 목마름 같이 하니 곧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마음은 참 성도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부분적인 욕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 속 사람이 간절히 사모하는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2) 사람에게 고통이 떠날 새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버리고 딴 것을 구한 까닭이었습니다. 세상의 것을 구하여 얻었다 할지라도 그 마음에 알 수 없는 공허와 불안을 가지는 것은 우리가 참으로 원하는 것을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영혼의 깊은 곳에서 사모하는 것을 아직 얻지 못한 까닭입니다. 영을 사모하는 자에게 세상의 것을 주면서 만족하라는 것은 마치 떡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돌을 주며 감사하라는 것이나 조금도 다를 바 없습니다.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주는 결과와 마찬가지입니다. (3)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위해 인간을 지으셨으니 나의 영혼은 하나님을 의지하기 전에는 평안이 없습니다”라고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이렇게 사모하는 까닭은 신비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사람은 현실에서 만족하지 아니하고 이상을 찾습니다. 그들은 영원함을 얻기까지 참 만족이 없습니다. 이는 사람은 영원에서부터 온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4) 요 6:68에서 베드로가 “주께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하였습니다. 렘 2:13에서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대개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영생의 근원이 되는 나를 버리고 자기가 물 웅덩이를 파니”라고 한 것을 보니 하나님 자신이 생명수 근원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에게서 찾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고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의 영은 목마른 사슴처럼 생명의 목이 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게 되면 한없는 행복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는 살 수 없고 견딜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사모하는 것을 보고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무디는 말하기를 “후일에 아마 신문을 보면 동부 노스필드 출생인 디엘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가 날 것이다. 그럴지라도 그 말을 믿지 말기를 바란다. 그때에는 지금의 나보다 더 생생하게 살 것이다. 그때에는 나는 낡은 육체를 떠나서 영원한 높은 집으로 올라가 있을 것이다. 그때 나의 몸은 사망이 나를 침범하지 못하고 죄가 더럽히지 못하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될 것이다. 나의 육체는 1837년에 출생하였고 영혼으로는 1856년에 출생하였다. 육신으로 난 나의 육은 죽을 것이나 영혼으로 난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무디는 명확한 미래관과 죽음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전도 생활에 전력을 기울이던 중 1899년 12월 22일을 마지막으로 임종하였습니다. 그는 임종시에 한평생 바라고 그리던 영광의 세계를 바라보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는 침대에 누운 채로 말하기를 “땅이 물러나고 내 앞에는 하늘 문이 열렸구나. 만일 이것이 죽음이라면 내 어찌 이것을 싫어할까 저 나라는 음침한 골짜기가 없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있구나, 어서 가봐야 겠다. 오늘은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쓰는 날이다”라고 하면서 운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귀절을 무디 선생의 비석에 기록해 놓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사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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