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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으로 큰 자 (눅 09:4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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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48절에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열 두 제자가 예수의 왕국을 지상의 왕국처럼 생각하고 있는한 그들 사이에 그 나라에서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경쟁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심중에 무엇이 작용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께서 작은 어린 아이 하나를 자기 옆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자기를 영접하는 자가 하나님을 영접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무슨 뜻이겠습니까 어린 아이는 대단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큰 자라고 하였습니다. 48절 말씀에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어린 아이를 예수님처럼 높이 여기라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어린 아이같은 작은 자를 잘 대접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또한 어린 아이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위신에 대한 욕망이 없습니다. 어린 아이는 지위에 대한 욕망도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 내에서 어떤 일이나 지위나 직분을 맡게 되면 그것을 명예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책임으로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교회 안의 봉사자들은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해서 진지하게 열심히 봉사하는 일만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영국 처칠 수상이 수상직에 올랐을 때 축하식에서 축하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원하는 것은 축하가 아니라 여러분의 기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어떤 직분에 택함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드높임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봉사하기 위해서 택함을 받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또한 어린 아이는 명성에 대한 욕망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봉사와 관대함이 남에게 알려지지 아니하면, 즉 감사하는 말을 듣고 찬양을 받지 않으면 봉사나 기부를 하려하지 않습니다. 봉사에 대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였는데 우리가 만일 칭찬의 소리에 대하여 선행을 행한다면 선행을 하지 않은 것이나 매한가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이와 같이 위신, 지위, 명성에 대하여 아무런 욕망이 없고 겸손하기 때문에 제일 큰 자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잠 14:31에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 16:5에는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화를 면치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만에 흐르는 자는 결국 자멸에 빠질 것이니 그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잠 17:9에 “자기 문을 높이는 자는 파괴를 구하는 자니라”고 이 점을 명백히 하였습니다. 자기를 높이는 것은 본래 마귀가 지은 죄입니다. 곧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큰 죄악입니다. 밀톤은 말하기를 “사단은 천국에서 섬기는 자 되기보다 지옥에서 왕자가 되는 것을 원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멀리서 볼 때에 교만한 자 같으나 가까이 가서 본즉 교만하지 않은 자도 있고, 멀리서 보기도 교만하고 가까이 와서 보아도 교만한 사람이 있으며, 멀리서 보아 겸손한 듯하나 근접하여 가까이 하여 보니 교만한 자가 있습니다. 사람은 교만해 보인다고 교만한 자로 단정지을 수 없고, 겸손해 보인다고 겸손한 자로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에 그 마음과 행동이 주님을 중심하고 있는가의 여부를 보고난 후에야 그 겸손 여부를 인정해야 합니다.

1. 겸손하여야 은혜를 받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많이 받을 터인데 어찌하여 은혜받지 못할 길을 고의적으로 택하고 있습니까 신학자 로버트 라이하튼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가장 친한 친구는 자기를 낮추는 자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신학자 안드류그레이도 “티끌에 가까이 앉은 자가 하늘에 가까이 앉았다”고 겸손의 중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2. 겸손의 덕은 무엇입니까 (1) 겸손은 남을 나보다 우월하게 여김인테 그렇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진리를 아는 자에게는 쉽게 행해집니다. 진리를 알고 보면 인간은 스스로 교만한 생각을 가지기 어렵습니다. 내면적으로 볼 때 우리는 우리의 부패성을 통탄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자기를 “죄인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남보다 자기를 우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도리어 남을 자기보다 우월하게 여김이 가장 좋은 판단일 것입니다. (2)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없는 것과 같이 여기고 아무런 불평이나 원성을 올리지 아니함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없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 겸비입니다. 내가 본래 무(無)였는데 지금 무(無)가 아니니 너무 감격하여 무(無)의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욥 1:21에서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겸손하게 욥은 말하였습니다.

3. 겸손과 진리의 파수 우리가 겸손을 말할 때에는 무엇에나 양보를 잘하는 태도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도 어느 정도 옳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겸손의 태도가 비진리에 대해서는 불타협주의를 가진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됩니다. 어린 아이는 겸손합니다. 그러나 그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누가 그에게 와서 그의 아버지를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위협할지라도 그는 울면서까지 “아버지”라고 인정할 것입니다. 유명한 교부 바실은 사랑의 사람이었고, 겸손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재산을 다 기울여서 가난한 자들을 도와주었고, 문둥병자들을 자기의 친형제처럼 여겼습니다. 그가 별세한 때에 불신자들까지도 슬피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진리 문제에 있어서는 불타협의 인물이었습니다. 발렌스 황제는 아리우스 이단자들을 용납하여 바실을 협박하였습니다. 협박하여 말하기를 “재산을 몰수하고 귀양살이 보내고 또 죽이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바살은 “그런 벌은 벌이 아니다. 지옥에 보내면 벌이겠으나 세상의 벌은 잠시뿐 천국에 들어갈 문이니 기쁠 뿐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겸손은 기독교의 제일되는 덕으로 알았고, 또 그 자신은 겸비하였으되 하나님 말씀을 위해서는 진리의 모든 적을 거슬려 싸우기를 열렬하게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88개의 이단을 밝혀내는 책을 저술하였으며, 동시에 이단 반박 문서를 내었습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 겸덕하지만 이 진리를 파수함에는 엄한 규율을 지켜 나약하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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