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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병고침과 전도 (눅 04:4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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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질병은 몸이 약하기 때문이라기보다도 영혼의 죄의 눌림에서 오는 것이 대부분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12년의 혈루병이 아니라 십수 년간에 걸쳐서 약골 박지행(薄志行)으로 인하여 고민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 한 구절에 접하여 용감자중(勇敢自重)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육안의 소경이 아니라 영안이 멀어 참과 거짓을 분별 못하는 사람도 일단 예수의 이름을 들을 때부터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 즉시로 광명의 경지에 들어가는 일이 있습니다.

1. 40절에 “해 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오매 예수께서 일일히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침에는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고, 낮에는 시몬의 집에서 그 장모의 심한 열병을 고치시고 이제 해 질 무렵 사람들이 온갖 병 앓는 사람을 예수께로 데려오니 주님은 일일히 그 위에 손을 얹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일과가 얼마나 분주하고 다망하였겠습니까 주님은 선을 행하며, 복음을 증거하며, 병자를 고치시며, 여러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이르는 곳마다 병자를 고쳤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위해 손을 얹으시니 그 병이 나았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모든 시간을 우리를 위해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제 밤은 지나고 새벽이 되니 주님은 홀로 있을 수 있는 쉬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에게 사람이 없는 한가한 시간은 하나님 아버지와 대화하는 기도의 시간이었습니다. 사람이 있을 때는 사람을 사랑함에 간절했고, 사람 없는 곳에서는 혼자 아버지와 함께 말하는 것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1914-1918년에 있었던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군인들의 한 참모회의가 막 시작한 참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참석했는데 단 한 사람, 최고 사령관 마살 포크가 불참했습니다. 드디어 그를 잘 아는 장교가 “그가 있을만한 장소를 알 것 같소”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총사령부 바로 옆이 있는 폐허가 된 교회당으로 그들을 이끌고 갔습니다. 바로 그 파괴된 제단 앞에서 마샬 포크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대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만나 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2. 42절에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새벽 미명 고요한 시간 무리를 만나기 전 기의 시간을 가지신 것입니다. 기도는 신령한 생활의 근본 비결인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세상 일을 보고, 그 다음에 시간이 있으면 혹시 기도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대개는 우리의 기도하는 마음이 세상의 복잡한 소리로 혼잡해지는 점에 대하여 그리 염려하지 않는 분이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를 등한시 여기는 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정성어린 기도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3. 기도를 등한시하지 않고 정성스러이 하려면 우리가 기도하는 일에 있어서 몇 가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1) 기도를 등한시하는 것은 죄 중에도 큰죄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를 등한히 여기며 게으르게 하면 악한 결과가 맺힙니다. 1) 신앙이 점차 약해집니다. 2)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3) 심령의 죄를 크게 여기지 않고 육신의 범죄의 무서운 결과나 조금 피하는 정도입니다. 4) 근근히 체면이나 유지하는 외식자 바리새인의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5) 기도를 등한히 하는 것은 죄를 짓는 도화선이 됩니다. (2) 기도의 법리를 알아야 기도를 싫어하지 않고 따라서 정성스러이 하게 됩니다. 우리가 무슨 일에나 방법을 모르면 취미도 없고, 그 일이 잘 실행되어지지 않습니다. 할레스비는 말하기를 “기도는 예술과 같고 예술 가운데서도 예술이니”고 하였습니다. 곧 기도는 아름다운 작품이란 말이니 그것은 사람의 지식이나 수사학이나 심미학으로 된 예술이란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의 법도대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라는 의미입니다. 기도는 말더듬이의 입으로도 능력있는 기도가 나을 수 있는 작품입니다. 기도는 두 가지로 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1) 성경의 말씀이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신대로 기도함입니다. 2) 그대로 많이 기도하여 기도의 말씀의 연단을 받음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교통하는 우리의 기도는 통달해야 되고, 선미하고 아름다와야 되고, 생명있게 움직여지는 관습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신앙입니다. 기도를 하기 전에 무엇을 기도해야 하겠다고 미리 설계하지 말 것입니다. 다만 기도는 하나님께 의뢰하고 주님께 나의 모두를 아뢰는 것 뿐입니다. 기도자는 그 기도에 응답받을 것인가에 대해서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모친 마리아는 어떻게 결과가 될 지 모르고 포포주가 떨어졌다는 사실만 주님께 아뢰었던 것입니다. 이 난제 해결에 대해서 미처 어떻게 해달라고 청하지 아니하였습니다만 주님께서 알아서 잘 처리해 주신 것입니다.

4. 마귀의 발언을 금지시키심 41절에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에게 말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왜 예수께서 잠잠하라고 거듭거듭 말하셨겠습니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에 대하여 자기들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로마를 정복하여 이스라엘의 독립국으로 세울 메시야였습니다. 당시에 이스라엘은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메시야만 나타났다면 즉시 뭉쳐서 반란이 폭발할 그런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란 소문이 퍼져 나가면 예수님을 모시는 이런 폭풍의 데모가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 나올 것이 명약관화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예수님은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메시야로 부르게 되기 전에 그들에게 메시야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즉 메시야라는 것은 정복하는 왕이 아니라 수난의 종이라는 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잠잠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이 내리게 된 이유는 사람들이 아직 메시야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잠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5. 떠나시는 주님의 발자취 4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라 하매”라 하였습니다. 언제인가 예수님은 여기를 떠나 다른 동네에로 복음을 증거하러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이 있을 때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빛은 오랫동안 함께 있지 않을 것입니다. 밤이 곧 올 것입니다. 그때 그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은 한 사람만이 아닌 온 인류를 위해서 오셨으니 나라는 존재에게는 주께서 단 1회의 좋은 기회를 부여하셨을 뿐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를 다른 사람에게 주기 위해서 주님은 가버나움을 떠나 갈릴리 여러 회당으로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떠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귀한 진리인줄 압니다. 기회 있을 때 주님을 열심히 믿어 모두 은혜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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