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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라마 나봇의 요새지 (삼상 19: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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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기록된 라마 나욧이란 지역은 수도도 아니며 군대가 주둔한 요새지도 아니며 그렇다고 상업이 번창한 경제의 중심지도 아니며 교육 도시도 못됩니다. 다만 라마에 있는 평범한 한 곳에 불과한 나욧이라 이름불리 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마 나욧은 옛날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제외할 수 없는 요지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사사요, 국부요, 선지자인 사무엘이 그의 문하생과 함께 우거하던 고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 말씀은 이러한 라마 나욧의 일면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 말씀만 보아도 라마 나욧의 비중이 그 처럼 컸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 라마 나욧의 성지는 의인이 보호받은 곳입니다 세상은 넓으나 의인이 발붙일 곳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참위로자를 만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아벨 후에 긴 역사를 내려오면서 아벨의 후예들이 가인의 후예들에게 고독한 소외 지대로 밀렸거나 아니면 숫한 죽임을 당해 온 것입니다. 다윗만 해도 그러했습니다. 당시 항간에 유행한 대중가요 가사대로 “ 사울 왕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의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 였습니다. 즉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세운 다윗의 공력은 사울 왕의 그것보다 단연 압도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환영을 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그와 반대였습니다. 그를 살해하려는 사울의 창검에 쫓겨 다윗은 언제나 풍전등화와 같은 위협을 느끼며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바로 이 때 다윗의 신변 옹호자로 나선 자가 다름 아닌 왕자 요가단이었습니다. 요나단은 어떤 면에서 다윗과의 정적이라 하겠습니다. 왕친의 후계자는 왕자 요나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앞으로 이스라엘 왕은 자기가 아니라 다윗이 될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요나단은 자기 왕위를 이제 앞으로 다윗이 계승한다는 것을 알면서 다윗을 자기 몸처럼 사랑한 것입니다. 그토록 요나단은 인격적으로 덕망이 높은 자였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을 위하여 궁중에서 궁중악사로써 거문고를 잡았을 때 사울은 창으로 다윗을 살해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윗은 그 위기에서 면하고 자기 집에서 잠복 은신하였으나, 사울 왕은 자객들과 군사들을 다윗의 집에 포위하고 다윗을 암살할 준비를 다하고 수비하였지만 다윗의 아내 미갈이 다윗을 창문으로 달아 내려서 도피케 한 후 인형 우상을 침대에 눕히고 염소털로 가장하고 자객들로 가택 수사할 때 다윗을 찾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다윗은 그 길로 라마 나욧의 요지로 피난가게 된 것입니다. 라마 나욧은 사무엘이 은퇴한 후 선지학교를 세우고 후배 양성에 전념하고 있던 성지였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다는 말을 듣고 수차에 걸쳐 다윗을 잡아 살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기적적인 은총으로 그 위기를 모면하게 된 것입니다. 사무엘은 라마 나욧에다가 세상에서 설 땅을 얻지 못하는 의인들을 보호해주는 곳으로 구별했던 것입니다.

2. 악인이 감화받은 곳이 라마 나욧입니다 라마라는 뜻은 ‘ 높은 곳 ’ 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높은 지역에 있는 성지일 것이나 보다 영적으로 높은 성지이기에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거기에 가면 큰 감화받는 곳이라는 이름일 것입니다.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다는 정보를 접한 사울은 곧 용기있는 포졸을 보내어 다윗을 포박해 오라고 명했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용사들이 라마 나욧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 수령으로 서 있는 것을 볼 때 사울의 용사들에게도 성령이 임하매 감동받아 예언을 하는 자가 되어 돌아오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른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그들로 함께 예언하고, 세 번째로 사자를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하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마지막으로 사울 자신이 라마 나욧으로 향하여 달려갔던 바 더욱 재미있는 현상은 사울 왕이 라마 나욧에 이르기 전부터 성령에 감동받아 멀리서부터 예언을 하며 라마 나욧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라마 나욧에 도착 후에는 웃옷을 벗으며 침상에 누우면서 큰 소리로 예언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가 옷을 벗었다는 것은 무장 해제를 한 것이요, 무장을 해제했다는 말은 다윗에 대한 살해할 의사가 없다는 뜻으로써, 침상에 누운 것은 그 마음에 평화가 임했다는 것을 그의 행위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 일어난 어떤 변화를 입증하는 것입니다. 마치 빙산을 녹이는 쇠덩어리가 용광로에서 물로 엉키어지는 형편과 같습니다. 라마 나욧 전역이 온통 성령 충만한 분위기로 화했으며, 성령이 충만한 라마 나욧 성지는 사울 왕의 광란기의 악령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라마 나욧은 과연 악인도 감화받는 곳입니다.

3. 라마 나욧 성지는 외부에 영향력을 구사한 곳입니다 라마 나욧은 갑부가 사는 곳도 아니요, 학자가 살고 있는 곳도 아닙니다. 그러나 한적한 곳인 라마 나욧이 바깥 세상에 막중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까닭은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과 그 문하생들이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리새인의 외식주의 냉혈파나, 서기관의 실리주의자나, 헤롯 왕의 폭력배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라면 도저히 그만한 영향력을 구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라마 나욧이 외부에 영향을 줄 수 있었던 바탕은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라마 나욧은 오로지 성령이 임한시고 역사하는 장소일 뿐이었습니다. 라마 나욧은 신뢰와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곳이었습니다. 라마 나욧이 신뢰할 수 없는 곳이라면 다윗이 찾아와 잠시라도 몸을 의탁했을리 없고, 사울 왕이 찾아와 무장 해제하고 옷을 벗고 침대에 누워 큰 소리로 예언할 까닭이 없을 것이며, 그리고 사랑이 없다면 다윗을 용납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평화를 추구하지 않았다면 사울을 그냥 살려 보내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중상모략, 시기, 분쟁에 신물이 난 사람들은 불신보다는 신뢰에 더 마음이 끌리기 마련이요, 부정적 해석보다 긍정적 제안에, 반대보다 포옹을, 파쟁보다 평화에, 교회에 돌 던지는 자보다 교회 상처에 함께 동참하며 아파하는 자에게 마음이 가기 마련이요 그러기에 라마 나욧은 그런 귀한 성지이기에 그 영향을 세상에 크게 끼쳤던 것입니다.

4. 오늘의 라마 나욧은 어디 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교회는 라마 나욧입니다. 오늘의 많은 성도와 장차 성도될 무리들에게 환란이 많은 이 세대에 라마 나욧의 교회는 안전한 도피성이 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환란 만난 자를 위한 도피성이(민 35장)있었으며, 어떤 죄인이라도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서(왕상 1:50) 하나님 앞에 회개 기도하며 제단뿔을 잡으므로 제사장의 목숨을 걸고 그의 생명은 보복자의 칼날에서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 같은 제사 제도는 모두 하나님의 성지,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교회, 라마 나욧의 권위와 능력과 보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라마 나욧의 교회는 주님의 신부로 신성과 사랑 뿐이며, 이 성지동산은 예수님의 화신이요, 얼굴이요, 표정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조명이며 하늘의 해와 달이 밤낮으로 세상을 밝힘같이 비추이며 교회는 산상에 세워진 성과 같이 적의 동태를 막아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니 악취와 부패를 막는 방부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사회의 지주이니 교회가 넘어지면 사회는 크게 혼란해집니다. 교회는 방주와 도피성 같아서 거기 가야만 영생이 보장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반석 위에 세웠으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요, 최후 승리는 교회이며 교회 권속은 다 하나님의 자녀이며, 우리 형제 자매입니다. 교회는 모든 성도는 같은 목적을 두고 성지를 찾았으니 방향도 같아야 합니다. 오늘의 환란 시절에 조난 당하는 자들을 위하여 교회가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의 교회가 권위를 상실해 가고 성령의 역사가 메말라 가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교회가 무력해지는 것은 금과 은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 고 명할만한 권능을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감화시키는 역사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다는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위하여 행하는 수고에는 헛수고가 없습니다. 냉수 한 그릇을 소자에게 베푼 작은 봉사도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셔서 생명의 면류관으로 보생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의인이 보호받는 라마 나욧 성지, 외부에 여항력을 구사하는 라마 나욧 성지, 악인까지 감화받는 라마 나욧 성지로 우리 한국 교회가 허락받았으니 성지를 위한 봉사와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며 더 충성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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