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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덩이에서 (렘 38: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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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많은 구덩이에 대한 인용이 나옵니다. 팔레스틴은 비가 적어 우물을 깊이 팠고 샘이 끊기면 아주 깊은 구덩이가 생깁니다. 또한 물을 저장하기 위해 구덩이들을 많이 팠고 유목민들이므로 그 고장을 떠나면 빈 구덩이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구덩이에 떨어지는 사고도 많았기 때문에 남의 짐승이 자기 집 구덩이에 빠졌을 경우의 벌칙까지 구약에 규정되었습니다(출 21:31). 예수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는 비유에서 유대인들이 흔히 보는 구덩이 추락사고를 인용하고 있습니다(마 15:14). 계시록을 여러 번 밑바닥 없는 구덩이 같다고(계 22:14) 표현하고 있습니다. 한 번 빠지면 헤여나올 가망이 없는 장소를 구덩이라고 합니다.

1.성경에는 절망의 구덩이에 들어왔던 세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 요셉입니다(창 37장) 요셉은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들어간 것입니다. 꿈에 사는 요셉을 질투하고 미워하여 광야의 구덩이에 쓸어 넣었던 것입니다. 요셉의 구덩이는 무엇인가 더 큰 목적이 스며있는 하나님의 약속의 구덩이였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1104번의 약속이, 구약 성경에는 7706번이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신구약 성경에 8810개의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곧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요셉이 겪은 배신의 구덩이, 질투와 미움의 구덩이 고통과 죽음과 절망의 구덩이도 하나님의 약속 속에 의미가 있었던 것입니다. (2) 다니엘이 들어갔던 구덩이가 있습니다(단 6장). 흔히 사자굴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 “굴에 떨어뜨렸다”, “끌어 올렸다”는 표현으로 보아 천연적인 혹은 저수용으로 지은 넓은 구덩이일 것입니다. 다니엘은 유대인 엘리트 청년으로 바벨론 왕이 예루살렘을 점령 했을 때 데려다가 교육하여 나중에는 다리오 왕의 총리 세 명 속에 들어갔습니다. 다니엘은 날마다 세 번씩 예루살렘 성전을 향한 창문을 열고 여호와 하나님께 경배하며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을 거세코자 하는 무리들이 다리오 왕을 신격화하는 법을 내세워 다니엘의 신앙을 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신앙을 지키다가 붙들려 사자들 구덩이에 던짐 받았습니다. 다니엘의 구덩이는 결단의 구덩이였습니다. 총리의 자리 그 화려한 물질생활, 그 성공, 외국청년으로서의 자랑스러운 성취 그리고 생명 그것들보다도 하나님의 첫 번째 계명인 “나 이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을 택한 어려운 결정의 구덩이였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에게 붙어 있던 우상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목숨을 걸고 여호와 하나님 하나만을 택하는 신앙입니다. (3) 예레미야의 구덩이입니다(램 38;1-13). 예레미야는 조국의 멸망을 예언하여 매국노로 몰렸습니다.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는 왕에게 항복을 권고하여 비겁한 자로 몰렸습니다. 그래서 소위 애국자들은 예레미야를 잡아 깊은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그러나 정말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의 장래를 염려한 것은 예레미야였습니다. 그는 민족을 사랑했기 때문에 정직했고, 사랑하기 때문에 양심을 따랐습니다. 예레미야의 구덩이는 사랑하기 때문에 받은 시련이었습니다. 진정한 사람은 양심을 밝게 합니다. 순수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냅니다. 사랑은 당신을 끌어 올려줍니다. 예레미야의 구덩이는 나라와 인간을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받는 시련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왜 이토록 민족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구덩이에 빠지기까지 고난당하였습니까

2. 민족의 회개를 위하여 예레미야는 민족의 회개를 위하여 눈물을 흘린 선지자입니다. 예레미야는 종교 지도자들과 민중들을 향하여 임박한 재난을 경고하면서 회개를 촉 하였습니다. 거짓 종교가들이 성전에서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면서 온갖 가증된 일들을 행하며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을 도적의 굴혈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백성들의 도의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친구의 말도, 형제의 말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종교가 부패되고 의식과 형식만 남고 교권자들은 교권을 악용하여 지위와 명예와 이득에만 탐하고 정치가 썩어서 매관매직, 탐관오리에 썩을대로 썩었으며 그런 반면에 국민은 개인주의와 향락주의로 사기, 횡령, 절도, 강도, 탕아, 음녀가 득실거리니 거룩한 성 예루살렘은 사악과 부패로 화해, 절망의 깊은 물 속으로 빠졌습니다. 그러나 표범이 그 가죽의 빛을 변하거나 구스인의 그 얼굴빛이 변할지언정 이스라엘 민족의 부패는 변할 수 없었습니다. 돌이켜 회개하지 않은 강퍅한 민족을 위해 예레미야는 눈물을 한없이 흘렸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렘 9:1에 “공중의 악은 그 정한 그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는 알지 못하는도다”고 했습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까“ 눈물을 흘리며 슬픈 노래를 불렀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애국 선지자이었든 것입니다. 우리도 조국을 위하여 38선이 무너지기 위하여 기도를 합시다.

3.조국의 구원을 위하여 눈물의 선지 예레미야가 목이 쉬도록 외치고, 발이 닳도록 민족을 향하여 걸으며 가르쳤으나 목이 곧은 민족은 끝내 회개치 못하고 나아갔음으로 유대 나라엔 국난이 홍수처럼 닥쳐왔습니다. 기어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대군을 거느리고 유대 나라에 침입하였습니다. 이 때에 눈물의 선지 예레미야는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주었노니 이 성에 거주하는 자는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으려니와 너희를 에운 갈대아인에게 나아가서 항복하는 자는 살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했습니다. 여기에 갈대아인은 블레셋 사람입니다. 유대는 당시 앗수르, 바벨론, 애굽의 세계 제패 3파전 틈에서 갈팡질팡하다가 바벨론에 망했습니다. 200년간에 중동세계를 호령하던 앗수르는 악화되어 그 서울 니느웨가 함락된지(주전 612) 수년 후에 갈대아 지도자들 밑에서 새로 일어나는 바벨론에게 망해 버린 것입니다. 나라의 흥망성쇠는 국민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거것 선지자들도 여호와께서 우리편에 계시므로 평강하리라고 외치면서 거짓 계시를 선포했습니다.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로 나타나십니다.” 눌린 자와 가난한 자 불행한 인간에게 긍휼로 나타납니다. 십자가로 속죄하려고 그리스도가 오신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공의로 삼고 우리 민족이 사랑을 베풀었던들 38선은 무너졌을 것이요 38선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겸손히 주와 동행하라고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말했습니다. 민족적, 문화적, 종교적으로 조국의 위기를 당하여 깊은 상상력, 건전한 사상, 예민한 양심, 용감한 충성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종, 믿음의 종, 애국자 느헤미야는 다할줄 모르는 정력과 자제력으로 묘략을 부수고 그들에게 새 생명을 전해 주고야 만 것입니다. 우리는 느헤미야 선지자 같이 내 조국을 위하여 울어야겠습니다. 우리는 애국자 느헤미야와 같이 내 조국을 위하여 내 죄를 회개하며 내 동포의 죄를 대신하여 기도하여야겠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와 같이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여야겠습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와 같이 내 조국을 위하여 내가 할 일을 다하여야겠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재간, 지식, 기술, 힘과 정성을 내 조국을 위하여 기우려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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