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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군중 한 가운데서 명성을 감추심 (막 03: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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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국자와의 정명 충돌에 말려들기를 원하지 않는 한 예수는 회당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공포 때문에 회당을 떠난 것은 아닙니다. 그 충돌에 직면하는 것이 두려워서 퇴각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때가 아직 도래하지 않았고 최후의 충돌의 때가 오기 전에 예수는 해야 할 일과 말할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는 성전을 떠나 갈릴리 바다로 향하였습니다. 거기에서도 군중들은 먼 곳에서 모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전 지역에서 모여들었고 외국 영토에서도 왔고 베니기아 도시인 두로와 시돈에서도 왔습니다. 군중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에 혼잡하게 되어 배를 바닷가에서 좀 떼어서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은 군중이 너무 많아 어려움을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의 병 고침은 그에게 커다란 위험을 끌어들였습니다. 왜냐하면 병자들은 자기들에게 안수해 주기를 기다릴 것 없이 예수를 만지기 위하여 밀려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주님은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을 만났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악령에 대한 신앙이 어떻든 간에 이러한 사람들은 그들의 외부에 있는 성질이 다른 악한 힘에 사로잡힌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들은 철학적, 신학적 감각으로 그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고 고대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결코 특수한 칭호는 아니었습니다. 애굽의 왕들은 진리(Re)의 아들이라고 불리워졌습니다. 어거스틴 이후 많은 로마의 황제들은 그들의 비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새겼습니다. 구약 성서에도 이것이 4가지 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 천사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창 6:2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의 아름다움을 보고 매혹되었다고 했습니다. 욥 1:6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주의 앞에 와서 선 날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천사에 대한 칭호이었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애굽으로 부터 불러내었습니다(호 11:1), 출 4:22에서는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고 말했습니다. (3) 백성의 왕은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삼하 7:14에 보면 왕에 대한 약속은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4) 중간 시대에 씌여진 후기의 책들 속에서는 ‘선인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시락(Sirach) 4:10에 아버지 없는 아이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에게 한 약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너는 하나님(지극히 높은 분)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 그가 너를 어머니 이상으로 사랑해 주실 것입니다.” 이상의 모든 경우에서 아들이란 말은 특별히 하나님과 가깝고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평행적이며 무엇인가 그 다 같은 뜻을 보여주는 것을 신약성서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울도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딤전 1:2, 1:18). 디모데는 바울과는 전연 혈연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대로(빌 2:19-22) 디모데의 마음을 그처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베드로도 마가를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벧전 5:13). 그것은 베드로만큼 그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아들이란 말을 복음서의 이야기의 단순함 속에서 대하게 될 때 우리는 철학적, 신학적, 또는 삼위일체의 교리의 말로는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말이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매우 가까웠기 때문에 다른 말로는 기술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귀신들린 사람들은 자기 속에 독립된 악령이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웬일인지 예수 안에서 하나님과 가깝고 하나님과 동질적인 존재를 느꼈습니다. 그들은 이 하나님과 가까운 분 앞에서 악령이 살아갈 수 없음 느꼈고 그것 때문에 두려워하였습니다. 왜 예수는 사람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고 엄히 경고하였습니까 그 까닭은 간단하며 매우 흥미를 일으켜 주는 것입니다. 예수의 메시야에 대한 관념은 일반적인 관념과는 전연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메시야 속에서 봉사와 희생, 그리고 최후에는 십자가가 있는 사랑의 길을 보았습니다. 일반적인 메시야에 대한 관념은 정복자적인 왕을 생각하였으며 이 메시야는 그의 강력한 병력을 가지고 로마인을 붙들고 현세적 권력으로 유대인들을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야가 왔다는 소식이 퍼지면 피할 수 없는 모반과 폭동과 반란이 일어날 것입니다. 특별히 갈릴리에는 민족주의자의 의도에 따르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습니다. 예수는 메시야를 사랑이란 말 속에서 생각하였고 사람들은 메시야를 민족주의자라는 말 속에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내가 곧 메시야라는 선언을 하기 전에 메시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바른 관념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도록 교육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현 단계에서 메시야의 내용을 선언한다는 것은 상해와 혼란과 비극 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불러일으킬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선언은 필요 없는 전쟁과 유혈만을 발생시킬 것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사람들은 메시야에 대한 개념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미숙한 선언은 예수의 전 사명을 파괴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11-12절에서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계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경계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가 자기의 명성이 높아짐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이름 없이 미천해지신 분으로 그의 백성을 구조하시려고 이렇게 경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요히 일하시기를 좋아하십니다. 그가 땅을 돌아가게 하시며 모든 별들을 공중에 달아 빨리 돌아가게 하시되 아무 소리도 우리에게 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를 남들에게 보이기를 힘씁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패역한 일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진정한 종교생활은 가장 좋은 갑옷은 되나 사람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겉옷은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가 행한 선을 인하여 나팔을 불 필요가 없다. 그 이유는 우리의 모든 행한 것이 끝 날에 천사의 나팔소리로 다 드러나겠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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