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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 본성의 어두운 국면 (잠 17: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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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허물에 대한 묵인 9절에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 주는 자가 남을 사랑하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인간에게 죄악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인생 문제는 다만 죄악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유일의 목적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어 그들로 하여금 사죄 받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서로 용서하도록 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남의 허물을 거듭 말하면 그것은 남의 아픈 데를 또다시 찔러주는 잔인한 행동과 같습니다. 사실상 사람은 몸이 상하여 아픈 것보다 그 인격이 무시되고 훼손되는 것에 의하여 더 큰 상처를 입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격에 손상을 주는 자와는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옛 글에 말하기를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말은 솜같이 따뜻하고 사람을 상하게 하는 말은 가시 같아서 한 마디의 말이 무겁기가 천금과 같고 한 마디의 말이 사람을 중상함은 아프기가 칼로 베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어거스틴은 때때로 많은 동역자들을 초대하여 같은 식탁에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는 그 좌석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서 붙였다고 합니다. “여기 앉아 있지 않은 사람은 허물을 말하지 말라.”

2. 지혜로운 한 마디의 효과 10절에 “한 마디로 총명한 자를 경계하는 것이 매 백개로 미련한 자를 때리는 것보다 더욱 깊이 박히느니라”고 했습니다. 충고가 옳은 줄 알면서도 그대로 따르지 않는 자들이 많은데 그들은 발뒷꿈치로 송곳을 치는 것과 같이 우매한 자들입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한마디 말을 달게 받고 회개하였고, 베드로는 주님께서 한번 쳐다보시는데 회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자도 충고를 달게 받는다는 의미로 “나의 선을 말해 주는 자는 나에게 도적이 되고 나의 악을 말해 주는 자는 내게 스승이 되느니라”고 했습니다.

3. 악한 자의 반역 11절에 “악한 자는 반역만 힘쓰나니 그러므로 그에게 잔인한 사자가 보냄을 입으리라”고 했습니다. 악한 자는 선한 일을 하기 보다는 악을 도모함으로 그 악함으로 인하여 큰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잔인한 사자를 만난 자는 죽임을 당하지 않으면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악을 도모하는 자는 스스로 위험을 초래하여 멸망으로 달려가는 자입니다.

4. 미련한 자에 대한 경고 12절에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콤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자는 미련한 자입니다. 그 가슴에는 분노가 잠자며 그 얼굴에는 노기가 서려있는 자는 미련한 자입니다. 새끼를 빼앗긴 암콤은 자기 새끼를 되찾기 위하여 만나는 자마다 덤벼들어 해치고자 합니다. 이 때 암콤은 새끼로 인하여 매우 성난 상태이므로 자기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덤벼듭니다. 따라서 이런 곰을 만나는 자는 커다란 낭패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성서는 미련한 자를 만나는 것보다 차라리 새끼 빼앗긴 성난 암콤을 만나는 것이 더 낫다고 합니다. 이는 미련한 자를 만나 같이 거하게 되면 영원히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빠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잠시 잠깐의 이득을 보고자 미련한 자와 같이 거하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하겠습니다.

5. 선을 악으로 갚는 자 13절에 “누구든지 악으로 선을 갚으면 악이 그 집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배은망덕 하는 죄인은 하나님을 극도로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 중에 자기 친구에게 배은망덕한 자가 있습니다. 자기가 받은 친절한 대우를 새까맣게 잊어버려 선을 악으로 갚는 자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선을 악으로 갚는 행위가 제일 악한 행위일 것입니다. 이들은 그들의 악한 행실로 인하여 멸망당하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6. 다툼에 대한 경고 14절에 “다투는 시작은 방축으로 물이 새는 것 같은즉 싸움이 일어나기 전에 이를 그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싸움이란 것은 작은 일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확대되고 나중에는 큰 일이 잘못되게 합니다. 그러므로 싸움은 불과 같은 것입니다. 불이 사정없이 불어 나가면 그칠 줄 모름과 같이 싸움도 별일이 아닌데 시작되면 크게 번져 나갑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적은 분쟁이라도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1871년에 시카고의 대도시가 절반 이상 화재로 전소되었는데 이는 어느 집 외양간에서 소가 등불을 찼음으로 하여 일어난 불 때문이었습니다. 1924년 세계 제1차 대전은 설비야라는 청년이 오스트리아의 황태자를 죽인 사건에서 발단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양의 주자는 말하기를 “싸움에는 이기기를 구하지 말고 재물을 나누는데 있어서는 많이 가지기를 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창 13장에 아브라함은 조카 롯과 더불어 다투게 될 즈음에 그 자신이 먼저 양보함으로 싸움을 하지 않았습니다. 행 15정에 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끝까지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다투다가 마침내 나뉘였습니다.

7. 그릇된 판단 15절에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불의한 재판이 하나님을 노엽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교회의 일에 있어서 의를 찾으십니다.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재판은 적극적으로 악을 장려하는 행동이니 마귀적인 것입니다. 악인을 의롭다하고 의인을 악하다고 한 이 세상 재판 중 가장 악하고 불의했던 재판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빌라도의 재판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 대신 살인자 바나바를 의인 대신에 살려달라고 하였으며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들의 죄를 후손들이 당하였던 것입니다. 국가의 정권도 이런 죄를 범하면 오래지 않아서 패망합니다. 이스라엘 시드기야 왕도 예레미야를 박해하더니 오래지 않아 바벨론에게 멸망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릇된 재판은 멸망의 앞잡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죄는 교만한 자가 범하고 뇌물을 주고받는 자가 범하고 선악을 분별 못하는 어두움에 거하는 자가 범하는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명히 분별할 수 있도록 늘 말씀 안에 거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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