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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전(聖戰)에 관한 율법 (신 2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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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에서 성전에 관한 문제가 크게 취급된 것은 기자들이 적군을 하나도 남김없이 학살하기를 즐기던 호전적인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윤리적 일신교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에서였습니다. 그들과 또 그들의 열조들은 다신교를 섬기던 백성들과 혼합하여 살면서 그들에게 관용을 베푼 결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얼마나 비참한 결과가 생겼던가를 그 쓰라린 경험을 통해 배웠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계약은 깨어지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비젼과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완고 말았던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이스라엘의 역활에 대한 이해는 바벨론 포로기의 예언자와 예수 및 그리스도 교회에 의하여 보존되었습니다. 신명기 기자들은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사라져 버릴 자들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이 전쟁을 종결시킴으로써 잔인성과 무정함을 완화시켰다 해도 그 들은 국제적인 기본관계를 바꾸어 놓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거룩한 전쟁시행에 관해서 일종의 인간적 고려가 생기게 됩니다. 즉 즐거운 일을 맞이한 사람들에 관해서는 병역을 면제시킬 것, 마음이 약하고 겁장이인 사람들은 제해 놓을 것, 평화협상을 제안함으로써 불필요한 유혈을 방지할 것, 그리고 적을 공격할 때 과수나무를 상하게 하지 말 것 등이었습니다. 10-11절에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할 때 그 성에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 그 성읍이 만일 평화를 회답하고 너를 향하여 성읍을 열면 그 온 거민으로 네게 공을 바치고 너를 섬기게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평화선언은 평화조약을 뜻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이스라엘의 성읍지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성읍들과는 조약을 맺고 그 성민들을 죽이는 대신 부역을 시키며 조공을 바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조약은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서 지키는 것으로 강자는 약자를 보호하며 약자는 강자를 섬긴다는 고대 근동 세계의 정규적인 조약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스라엘과의 조약관계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이방인들이 우상을 버려야 하고, 할례는 받지 아니한다 하나 그들이 개종함으로써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예배하고 새로운 주인에게 공물을 바친다는 조건하에서만 성림되는 것입니다. 이런 조건하에서만 전쟁이 중단될 수 있고, 이런 복종 조건하에서만 정복자가 그들의 보호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는 비록 하나님이 가장 공정하게 원수들을 파멸시킬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의 파멸을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평화를 선포하고 그들과 화해하기를 간청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정의를 가장 싫어하는 자들에게만 파멸이 선포되고 있습니다. 만일 그들이 평화에 응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문을 열고 하나님께 종으로써 공물을 바치는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그들은 파멸에서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12-13절에 “만일 너와 평화하기를 싫어하고 너를 대적하여 싸우려 하거든 너는 그 성읍을 에워쌀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네 손에 붙이시거든 너는 칼날로 그 속의 난자를 다 쳐 죽이고”라고 했습니다. 평화의 제안이 수락되지 아니하면 그 때는 전쟁을 하게 됩니다. 만일 그들이 평화의 제안을 거절하오 제한된 시간 내에 그 제안의 혜택을 받지 않는다면 심판은 집행됩니다. 그들은 평화적 제안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평화의 제안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성전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고 했습니다. 13절에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이스라엘 손에 붙이시겠다는 약속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공의의 이름으로 모든 군병들은 칼로 치고 무장할 수 있는 모든 남자는 칼로 쳐 죽이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14절에 그들이 취한 전리품은 이스라엘인들이 가지도록 허락되었는데 거기에는 여인들과 아이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합법적인 전쟁에서 획득한 것은 정당한 재산으로 인정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심이라”고 했습니다. 16절에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라고 했습니다. 18절에 “이는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하여 너희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케 할까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약속의 땅 안에 있는 이방 성읍은 정치적으로도 이스라엘에게 위험이 될뿐 아니라 또 종교적으로도 유혹의 위험이 많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가차없이 전멸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진멸은 히브리어로 “혜렘”이라고 부르는데 이방인에게 속한 모든 생명체는 사람이나 짐승을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죽이라는 것입니다. 고대 싸움은 제신에 대한 싸움이니 만큼 “헤렘”사상은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께 대한 절대 순종을 뜻하며, 동시에 이방신에 대한 추호의 동정이나 연민을 허용하지 않은 사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19절에 “너희가 어느 성읍을 오랫동안 에워싸고 쳐서 취하려 할 때에도 도끼를 둘러 그곳의 나무를 작벌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먹을 것이 될 것임이니 찍지 말라 밭의 수목이 사람이냐 너희가 어찌 그것을 에워싸겠느냐”고 했습니다. 가나안 성읍들은 성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외부 세력이 성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성 밖에 진을 치고 토성을 쌓아 올리거나 아니면 벽에 구멍을 뚫고 쳐들어가야만 했습니다. 신명기 법전은 이스라엘이 어느 도성을 에워쌀 때 과일이 열리는 나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열매를 따먹을 수 있으며 그렇지 않은 나무만 잘라 포진 중에 연료로 살거나 아니면 공격용 재목으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이같은 자연보호 원칙은 신명기의 특징인 인도주의적 사상의 영향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성읍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많은 목재를 사용했는데 “오늘 같이 포탄이 없었던 인해전술 작전의 시대였으므로”전쟁이 한창 무르익으면 유실 수목도 성벽 공격용 목재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실과수는 사용되어서는 안된다고 명시한 것입니다. 그 이유인즉 “과실수는 사람의 생명이니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임하는 군인과 지휘관들에게 전쟁터로 변한 그 땅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무엇이나 황폐하게 만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절대적으로 불가피한 파괴 이상의 파괴를 초래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대한 정신은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 뿐 아니라 그들의 생업에 대해서도 관대함을 보여줄 것입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만”음식이 없으면 목숨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고로 본문은 고의적인 낭비를 금하는 조항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과실수는 땅만 헛되이 차지하는 것이 아니면 자르지 아니했고, 누구든지 고의로 그릇을 깨고 의복을 찢고 우물을 막으며 건물을 넘어뜨리거나 음식을 못쓰게 만드는 사람은 “너희는 파괴치 말라”는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부서진 빵조각도 손실되는 것이 없이 다 모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모두 선합니다. 그래서 거부되어야 할 것도 없듯이 남용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부주의하게 남용한 바로 그것이 없어서 궁핍하게 살게 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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