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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유의 원천과 그 방향 (고전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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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야 전봇대로 이를 쑤시든 말든 내 마음이야.” 이것은 어느 소녀가 내뱉는 말이었습니다. 하기야 내가 하는 일에 대하여 다른 사람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전봇대로 이를 쑤셔서 이가 부러지든 잇몸이 상하든 남이 상관할 바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유인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를 구속하는 모든 일은 무조건 괴로운 것입니다. 간섭하고 구속하는 것은 누구든지 모두 싫어합니다. 요즈음에는 다른 사람이 간섭하는 것을 무척 싫어합니다. 그래서 “일찍 일어나거라, 제 시간에 식사하라, 일찍 들어오라, 문을 조용히 닫아라, 떠들지 마라”등 모두 듣기 싫고 귀찮은 간섭입니다. 이렇게 자유라는 서구적 사고방식이 이기적인 면만으로 치우쳐 방종이 되고 급기야 저 무지한 전봇대같은 몽둥이로 변하여 수천년을 두고 자라온 우리의 생활양식과 생활문화를 파괴하는 횡포를 부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자유라는 분위기에 감사하는 마음도 경건의 자세도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개화의 물결이 들어오면서 모든 생활방식이 내 자유를 구속하는 형틀로 생각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고 자연주의가 처럼 모든 인습에서 벗어나면 합리적인 자유인이 되어 좋은 사회, 좋은 세상이 이루어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야수적인 충동과 걷잡을 수 없는 방종과 안하무인격의 행동 뿐이었습니다. 서양 사람이 인습없이 산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더 거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질서를 생활화한 것은 중세기의 1,000년 동안 형성된 엄격한 종교생활에 의해 뼈 속 깊이 새겨진 생활양식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개인과 단체를 철저히 구별하고 절제할 줄 압니다. 이러한 개인생활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민족의 각 개인을 하나로 묶어 민족의 유대를 갖게 하고 또 민족문화를 이루게 합니다. 일본에서 만나고 헤어질 때 나누는 그들의 인사 형식을 보십시오. 그들이 인사를 할 때 다섯 번이나 여섯 번씩 허리를 굽실거리는 것을 보고 웃지 않을 외국인은 없습니다. 방 안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것이나 찻잔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나 천황을 신처럼 모시며 신사참배하는 것 등은 하나같이 다 우습게 보입니다. 그러나 일본 민족은 이러한 생활양식을 가지고 생활한다는 것이 의미있습니다. 이런 생활토대로 일본은 단결하여 무엇이든지 하는 것입니다. 옛날 그리스 사람은 자유를 정의하기를 “자유는 자신이 처해있는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자신의 의지로 자신을 지배하는 힘”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이것을 자율이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자유라는 것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인지라 자유를 잃은 백성들은 이것을 다시 회복하고자 투쟁을 거듭하여 온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바로 이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역사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인권의 자유가 없다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부르짖던 프랑스 자유 혁명을 비롯하여 역사상의 여러 민족과 사회 속에서 많을 혁명들이 있었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자유없이 살았던 분들이나 이북 공산 치하에서 고생하다자유를 찾아 월남한 자들, 얼마나 자유를 사모하며 동경했는지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애써 얻은 자유이지만 그러나 기억할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자유는 결코 만족한 자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조 아담이 범죄하므로 인류는 사실상 죄의 종이 되었으니 죄를 벗어버리기 전에는 자유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우리가 자유로 행하는 모든 일이 선을 이루는 결과가 되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에 원치 않는 선을 억지로, 강제로 체면에 못이겨 행한다면 그것은 선이 아니고 자유도 아닙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원하여 행하는 일마다 다 선을 이루는 경지에 도달했을 때 이것을 자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죄의식이 사라졌을 때 그는 완전한 자유인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자유를 당신의 무한하신 값을 치루시고 얻으신 것입니다. 이전에 저 아프리카에 있는 어떤 항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 척의 기선이 막 떠나려고 기적을 울리는 순간 그 기선의 승강구에는 흑인 청년 하나가 서 있었고 맞은 편 부두에는 흑인 노파가 서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서로 손을 굳게 붙잡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손을 놓으려고 하지도 않고 다만 흐느껴 울기만 합니다. 결국 이 때문에 기선의 출발이 일 이분 지체되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서 있던 백인 한 사람이 참다 못하여 노기와 독기가 가득 찬 얼굴을 하며 채찍을 들어 그들의 손등을 내려 갈기고 말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좀처럼 손을 놓으려 하지 않으므로 백인은 채찍을 사정없이 더욱 강하게 내려 칩니다. 이윽고 그들의 에서는 붉은 피가 방울방울 흘러 내립니다.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손을 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때마침 무슨 일이 있어서 부두에 나왔던 어떤 선교사가 이 딱한 광경을 보고 채찍을 든 백인에게 그 사연을 묻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내용인즉 그 흑인 청년은 지금 노예의 몸으로 그 백인에게 팔려서 사랑하는 어머니를 뒤에 두고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나게 된 것입니다. 이제 헤어지면 다시 볼 수 없는 이 모자(母子)는 기막힌 사정을 어느 누구에게 호소할 길도 없고 그저 한없이 붙들고 울기만 한 것입니다. 비록 채찍을 맞아 붉은 피가 떨어질찌언정 이 모자 사이에 얽혀진 사랑은 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사정을 알게 죈 선교사는 백인을 향하여 그 청년을 자기에게 다시 팔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물론 북아메리카에 가면 상당한 이득이 있겠지만 벌써부터 이렇게 취급하기 곤란한 노예는 팔아버리는 것이 상책이라 생각하고 선교사의 요청대로 본값에 팔았습니다. 그 청년은 배에서 내리고 기선은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이 흑인 청년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새로 만난 이 백인이 또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잠시 후 이 선교사는 청년에게 “이제부터 너는 자유다. 이제 너는 집으로 돌아가 네 마음껏 사랑하는 어머니를 봉양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청년에게는 꿈에도 생각치 못했던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청년의 대답은 선교사에게 뜻밖이었습니다. “나는 이대로 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당신이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서 나를 살려주셨는데 내 어찌 이 은혜를 갚지 않고 그대로 가버리겠습니까 이제부터 나는 당신의 종이 되겠습니다. 당신이 어디를 가든지 따라 가겠고 당신이 시키는 일이라면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겠습니다. 절대로 나는 떠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이 청년은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즐거운 마음으로 자기를 건져 준 선교사의 종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랑으로 종노릇한 것입니다. 자유를 동경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갑시다. 죄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기쁨을 주시고 자유를 주십니다. 그는 자유의 근원입니다. 주님을 따를 때 우리의 마음은 평안을 느끼고 소망의 햇빛이 솟아 오르며 그 길이 환히 보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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