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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능성의 발견 (막 09: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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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21세기로 향하여 줄달음질치고 있는 현대 과학과 이 과학으로 말미암아 생겨지는 고도의 기술의 발달은 인간으로 하여금 무한한 가능성의 소유자로서 이 역사와 세계 앞에 군림하게 하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일찍이 자기의 사전 속에는 불가능이란 말이 없다고 하였는데 오늘 현대인들은 불가능을 잊으면서 인간 만능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이나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원시인처럼 종교가 필요있겠느냐”고 말하는 자가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 철학으로 신을 헌신짝 버리듯이 버렸고 오늘날 과학 만능을 찬양하는 자는 과학의 기술을 신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이 사는 세계는 기계를 신으로 모시는 시대가 되었고 혐오감으로 종교를 보고 종교 생활을 하나의 무지의 소치라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의 사람은 옛 사람이 상상 못하는 일을 어려움 없이 다 하고 있습니다. 아침 식사는 뉴욕에서 먹고 점심은 런던에서 하고 저녁 식사는 다시 뉴욕에서 하는 거리 단축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멕시코 세계 올림픽 광경을 서울 안방에서 TV로 다 구경하는 세상입니다. 사실 이런 가능의 사실은 1936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에서 세계 마라톤 왕으로 월계관을 쓰던 그 때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달나라라면 계수나무가 있고 그 밑에 토끼가 절구방아를 찧고 있다는 전설적인 노래의 대상으로만 알았지만 인간은 발로 달을 딛고 암석과 먼지뿐인 달의 정보를 제공한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가능성의 문화권에서 살고 있습니다. 사람의 삶은 개인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자기의 가능성을 더 많이 확보하는 것을 자유라 생각하고 그것을 평화요 행복이라 생각합니다. 부자유의 속박은 가능성의 제한에 정비례합니다. 행복이란 것도 인간 자신이 가지고 싶어 하는 가능성에 정비례하는 것입니다. 국가 발전이란 것도 고속 도로나 고층 건물을 많이 세우고 공장을 많이 세운다는 건설의 양상처럼 눈으로 볼 수 있는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당면한 현실에서 보다 나은 가능성을 어떻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가능성의 개발이 곧 국가 건설과 발전에 기초적인 요소입니다. 우리가 가진 인적 자원과 우리 땅에 묻힌 자연의 자원, 그리고 기술 자원을 어떻게 국가 발전이란 목표를 향해 가동시킬 수 있는가 하는 그 가능성을 충분히 발굴할 수 있어야 정치의 성공이요 교육의 성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세계 전쟁은 무기와 무기의 싸움이 아니라 참모의 싸움, 곧 가능성의 싸움, 가능 발굴의 싸움입니다. 승리의 가능성을 어디서 어떻게 찾느냐 하는 것이 작전이요, 지휘요, 전투행위라 생각됩니다. 낙오병, 패잔병 또는 도주병 같은 말은 군인 사회에서는 가장 수치스러운 말인데 이것은 곧 가능성이 없다는 뜻입니다. 군인이 교육을 받는다 훈련을 받는다 하는 것은 그의 가능성을 보다 더 낫게 개발하자는 것이겠습니다. 그의 자랑과 긍지는 다만 어떻게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발견하며 가장 적절한 순간에 사용할 수 있는가 함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가능성을 발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가능성을 발견할 줄 아는 인간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한 개인의 가능성을 발견함이 국가 발전에 가장 필요한 일이라 할 때 이 가능성의 개발은 연구와 훈련으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훈련이나 지식의 축적과 가능성의 발견은 한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에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의 마음을 잘 씀으로 천사도 되고 잘못 쓰면 악마도 되는 수가 많습니다. 훌륭히 개발할 조건이 있다고 해도 그 가능성을 사용할 그 사람의 마음의 자세에 이상이 있으면 그 훌륭한 교육과 훈련이 한푼어치 가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육과 훈련이 중요하지만 그 교육과 훈련을 받는 마음의 자세는 더욱 더 중요합니다. 마음과 정신의 자세는 결국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의 문제요, 윤리의 문제는 결국 종교적인 것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종교적 입장에서 오늘 그 가능성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여기 본문 막 9장에 기록된 병든 자의 아버지는 처음에 약간의 의심을 가진 것 같습니다. “선생님, 하실 수만 있으면 제 아이의 병을 고쳐 주십시오” 여기 의심은 가능성에 대한 의심입니다. 할 수 있으면 더 좋겠고 할 수 없으면 어찌할 수 없는 도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아버지가 가진 반신반의의 태도를 책망했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선언을 솔직하게 받아들인 그 아버지는 “주여, 내가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였습니다. 즉 가능성의 발견이 인간이 가지는 믿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무엇이나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믿는 자에게는 무엇이나 가능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믿는 자에게 불행이 닥쳐오며 가난한 자도 있고 실패자도 있고 질병에 고생하는자도 있습니까 믿음의 힘은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돈의 힘보다 더 클까요 과학의 힘보다 더 클까요 군사력보다 더 클까요 우리는 자주 주님의 말씀 “믿는 자에게 불가능이 없느니라”는 선언을 의심해 봅니다. 신앙은 모든 가능성의 원동력이 된다는 말에는 거리가 멀다고 말하는 자가 있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논리적으로 분명히 아는 것, 즉 지식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 함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보여주는 사랑은 부모 자신도 다 설명 못하고 그 사랑을 받는 자식은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의 사랑은 알 수 없다고 할 수도 없고 이해가 안 된다고도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사랑해 보고서야 압니다. 즉 사랑은 체험을 통하여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아는 길은 그 자신이 부모가 되어 보아야 비로소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것도 사랑과 같이 지식의 척도와 이성의 법칙으로 알아지고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남을 신임해 보기 전에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신임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도 자기가 시간과 정력, 성심과 열의를 다 바쳐 믿어보는 경험이 없이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 자격을 갖지 못합니다. 23절에서 예수는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니 24절에 아이 아버지는 큰소리로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참 신앙은 자기에게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 믿음 없는 상태를 고치기 위하여 그 믿음의 주인 되시는 분에게 “내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하는 이 간절한 요구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믿음은 자신이 믿음이 없다고 안타까와 하는 자에게 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신앙에 대한 이해와 태도를 달리해야 하겠습니다. “주여, 내가 믿습니다” 하는 이 한 마디가 전부라 생각하는 사람은 믿는 체하는 사람이요, 믿음의 능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 간질병 아이의 아버지와 같이 “내가 믿습니다” 하는 말 다음에 또 한 마디 “내가 믿음이 없습니다. 나를 도와주옵소서” 하는 청구가 있어야 합니다. 간구와 의지심으로 부터 비로소 무엇이나 할 수 있는 신앙의 가능성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이 무엇이나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고 사도바울은 이 믿음을 보배라 했습니다. 이런 보물이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담겨졌으니 이는 헤아릴 수 없는 능력이 하나님에게 있으며 우리는 그 능력을 발견해야 합니다. “내가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옵소서” 하는 간절한 간구를 할 수 있는 그 참된 신앙으로 인간이 할 수 없는 가능성이 하나님의 가능성으로 바뀌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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