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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삶의 의미 (갈 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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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가장 흥미있는 문제는 人生에 관한 문제입니다. 인생은 무엇입니까 어디에서 왔고 무엇하러 왔으며 어디로 갑니까 생의 가치는 어디 있는 것입니까 이런 질문들은 우리 인생에게 항상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생의 문제에 관심과 흥미를 가지는 이유는 그것이 곧 내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잡지에 투고를 하여 내 원고가 실린 잡지가 내 손에 들어오면 내가 쓴 글을 먼저 읽기 마련인 것과 같습니다. 그 이유는 그 내용을 몰라서가 아니라 내 원고에 가장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생명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프랑스의 문인 빅토르 유고는 “맑게 개인 가을밤 창 밖에 나가 창공을 바라보니 수많은 별떨기가 반짝이고 있었다. 우주의 무한대의 불가사의한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으리라. 또 다시 조용히 내 자신을 살펴볼 때 더욱 경탄한 사실을 발견한 것인데 그것은 무한대의 우주에 비하여 창해 일엽에 지나지 않는 인생이 대자연을 받아들이고 인식하며 정복하려 함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1. 생을 무의미하게 보는 자가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육체의 생은 악이요 거짓이다. 따라서 이러한 육체의 생명을 멸절시키는 것이 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희망해야 한다” 고 하였고, 석가모니는 “질병과 고통과 노쇠와 죽음을 피하기 어려움을 의식하면서 살아갈 수 없다. 내 몸을 생에서, 생의 온갖 가능에서 우리는 탈락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으며, 염세철인 쇼펜하워는 “인생이란 존재해서는 안될 것을 이름이니 생은 곧 악이라. 그러므로 생에서 무에의 전환이 인생의 유일한 선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생을 무의미하게 보는 사람들의 사상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현대인에게도 널리 퍼져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1) 무지 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자는 생의 가치, 생의 의미, 생에 관한 일체의 것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2) 쾌락주의의 사람입니다. 순간적 향락을 위하여 영원한 보화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눅 12:13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 같이 안중에 하나님도 없고 이웃도 없고 자신의 향락에만 도처되어 사는 사람입니다. (3) 용기와 정력으로써 생의 문제와 대결해 본다는 태도의 사람입니다. 이런 생을 사는 자는 자살하는 자가 많습니다. 행복을 얻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면 생을 무의미하게 보아 자결합니다. 이상하게 이런 자는 농촌보다 도시에 더 많고 무식층보다는 지식인들에게 더 많습니다. (4) 생을 부득이 이끌어 가는 처세술에 능한 사람입니다. 살고 싶어 사는 인생이 아닙니다. 죽을 수 없어 사는 인생입니다. 세계 1차 대전이 유럽에 대하여 무엇을 의미하였던가 하는 질문을 슈벵그라는 그의 “서양의 몰락”이라는 책에서 묻고 답하고 있습니다. 세계 제1차 대전은 유럽의 전통적 이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들어 역사의 목표와 생존의 의미에 관하여 허다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알 수 없는 공허감을 남겨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공허감을 메꾸는 것으로 보여졌던 파시즘도 역시 니힐리즘의 정신을 가진 혁명이었다고 하는 사실이 제 2차 대전에 폭로되고 말았습니다.

2. 인격의 가치 모든 인격은 하나이지 둘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최고의 이상적인 인격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인격에는 한점의 흠도 없으며 죄의식도 없습니다. 예수는 세계 인류를 위하여 회개를 명하고 겸손을 가르치며 죄사함을 받을 필요를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회개할 죄가 없으시고 죄를 의식한 일조차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였으며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순종하시며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은 완전하고 깨끗했습니다. 우리가 누구를 완전한 인격자라고 할 때는 만인의 사표가 되고, 사람을 끄는 힘을 가졌으며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복종케 하는 힘을 가진 자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제하고 완전한 인격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세상에서 자신을 가리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한 사람은 예수님 외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소크라테스, 공자, 맹자, 석가모니도 진리는 이런 것이라고 가르쳐 주기는 했지만 내가 곧 진리라고 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사람들이 인격자라고 해도 이는 상대적인 말이며 또한 완전한 인격의 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대적이며 부분적인 인격도 역사의 진행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인격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까 인격의 힘은 무엇입니까 (1) 화합과 조화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격의 힘이 부족한 국민에게는 사상적 화합을 기대할 수 없고 균형있는 조화의 의미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2) 창조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식하는 나’와 ‘의식되는 나’가 있는데 이것이 차별의 제일보입니다. 나가서는 자타의 차별이 있고 나와 우주간에 차별이 있고 하나님과 인생과의 차별이 있어 특색을 존중하고 사람의 권리와 개인적 활동을 존중하게 됩니다. 인권옹호의 구호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힘이 지배 받는 국가 사회에서만 이루어질 것입니다. (3) 인격의 힘은 모든 힘의 원천이 됩니다. 테니슨이 “심연과 같은 인격의 깊은 곳”이라고 노래했듯이 우리는 완전무결한 그리스도의 인격을 기초로 하여 우리의 인격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1) 완전한 인격은 무한하신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을 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과 인간은 인격적으로 서로 관련을 맺고 있지만 주종관계는 아닙니다. 3) 하나님의 사랑은 불변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온전한 인격을 나타내기 위해서 성육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격의 발전을 가로막는 몇 가지 요소들이 있습니다. 1) 국가 지상주의입니다. 국가 지상주의는 인격을 무시하기 쉽고 자칫하면 권력 만능주의에 빠져 버립니다. 기독교는 권력의 힘도 없이 단지 신앙으로만 뭉쳐있는 단체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인격을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무력으로 빼앗는 것이 아니라 신앙으로 빼앗아야 되는 것입니다. 정신적, 신앙적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걸고 대로마제국과도 싸운 믿음의 선배들이 있지 않습니까 오늘도 이 진리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2) 숙명론입니다. 사람은 운명의 그물에 쌓여 있어서 도저히 이를 헤치고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유명한 쥴리어스 시저같은 사람도 이 숙명론의 노예가 되어 로마에 개선할 때마다 승리자를 질투한다는「네메시스」신에게 희생 제물을 드렸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숙명론의 멍에를 벗어버린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만일 우리가 바울의 교훈을 겸손히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자녀가 되어 천국의 후사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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