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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수난의 종과 나 (롬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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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요 10:14에서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나를 안다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내가 목숨을 버리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다시 목숨을 얻으려는 것이다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지 못 한다 내가 스스로 내 목숨을 버린다 나는 내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주님의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기독교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손과 발에 직접 못을 박은 로마 군인들의 죄도 그다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수난에 대해서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를 죽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연히 된 일도 있고 우연하지 않은 것도 있으나 문제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행 2:22-23에 보면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사람들이여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께선 권능과 기이한 일과 표징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나타내 보이신 분이십니다”고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바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주님의 수난은 모두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롬 8:22에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신 것은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한 은사를 주시기 위함이시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위에서 말한 사실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믿음을 말하면서 그는 하나님을 사망 중에서도 생명을 일으키시는 분으로 믿었고 바랄 수 없는 중에서 바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여겼습니다. 그러면서 이 의는 아브라함만 위해서 허락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도 허락한 것이며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이로 믿는 사람은 이 허락을 받을 수 있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우리 죄 때문에 내려준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희생의 양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법적인 절차를 .생각할 때 살인죄를 범한 죄인은 사형 집행자에게 넘기어 집행하게 되는데 여기서도 이런 뜻에서 내어준 바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로마서의 중심사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표본으로서 죽은 것이 아니라 대속자로서 죽은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속자로서 죽으심은 4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음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가령 예수님께서 재판 받으실 때 아주 중한 죄를 지은 바나바라는 인물이 나왔습니다. 요한 복음서에는 바나바를 강도라고 했고 누가복음에는 민란과 살인을 하여 옥에 갇혔다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귀한 절기에 죄수 한 사람씩 놓아주는 예가 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와 바나바를 앞에 두고 누구를 놓아줄까 하였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바나바는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쳤습니다. 가룟유다에 대해서는 몇 절 밖에 없는데 바나바에 대해서는 38절이나_기록했습니다. 바나바는 어떤 인물입니까 바나바의 뜻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영적 의미로 말하면 바나바는 모든 아버지의 모든 아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아담의 자손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약탈한 사람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다른 사람의 영혼을 죽인 살인자들입니다. 더구나 어두운 죄의 감옥에 갇혀 있는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내려진 사형언도를 받고 떨면서 그 심판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바나바 같은 사람들입니다. 사형 집행 전의 사형수의 심정을 간수들을 통해 들어 보았습니다. 사형장에 가는 길에 비가 와서 길은 진흙과 물이 고여 있는 곳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형수들은 몇 분 있으면 죽을 자기 몸인데 애써서 물 고인 곳을 피하면서 걸어가고 교수대에서 목을 조를 줄을 잡고 놓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독가스실에서 죽을 사형수는 가스실에 들어가기 전에 숨을 깊이 들이 쉬는데 어떤 사람은 숨을 깊이 들이 쉬는데 눈이 툭 솟아나올 정도로 심호흡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이나마 생에 대한 애착이 간절했던 것입니다. 이때 바나바를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손바닥을 쳐다보면서 십자가의 처참한 죽음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군중들의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감방 문이 열리더니 간수들이 들어와 매인 쇠사슬을 풀어 놓습니다. 이제 죽을 때가 됐나 보다 하고 생을 체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간수가 하는 말이 이제 너는 방면이 되었으니,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마음대로 나가거라 하고 놓아주는 것이 아닙니까 바나바는 얼빠진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죽을 시간만 기다리다가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그는 군중 속에 가보니 자기를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소서 죽이소서 떠듭니다. 자기가 죽을 그 자리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서 계신 것입니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기까지의 전후를 뒤에서 다 지켜보았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망치 소리를 들을 때 바나바는 자기 손바닥을 쳐다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의 수난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얼굴을 보세요. 가시관 쓰신 주님, 못에 박힌 두 손과 발에 피가 흐릅니다. 그 옆구리는 로마 군인이 창으로 찔렀습니다. 6시간 이후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하시니 바나바는 마음속으로 나 대신 죽었구나 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육신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바나바를 대신하여 죽은 것 외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생각하면 사실주님은 나를 위해 돌아가신 것입니다. 나는 형벌 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대신하사 나 대신 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값 대속주가 되셔서 그가 친히 지불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하심을 조금도 상하지 않으셨습니다. 기독교는 다음 세 마디 말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나는 지옥에 가야 마땅한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내가 갈 지옥을 취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갈 곳은 천국뿐이다. 영수증이 있으면 다시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갈보리 십자가 보혈로 내 죄 값을 모두 지불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하심은 빚을 갚는 영수증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나와 상관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나 때문에 고난 받으신 주님을 위하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그 사랑에 감격하여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드리는 새로운 결단의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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