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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선택 (창 13: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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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활 가운데 아마 선택 만큼 중요한 일은 별로 없는 줄로 압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 있기 때문에 이 자유를 마음대로 행사하는 것이 인간의 권리이지만 그러나 그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는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특히 친구의 선택, 학교 선택, 전공과목 선택, 배우자 선택, 거주지 선택 등은 인간 일생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한 가지 선택이 백 가지의 화복을 결정하게 되는 일은 인간생활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올바른 선택을 한다는 것은 일생을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한 중대한 첩경이 되는 것입니다. 롯은 요단 강가 스알 평지의 비옥한 곡창지대 수원이 풍부하고 초원이 많은 살기 좋은 땅을 택하여 아브라함과 작별한 뒤 가족과 육축을 데리고 그 곳으로 옮겨 갔습니다. 한편 아브라함은 롯을 보낸 다음 가나안 땅을 자기의 정착지로 삼고 그 곳에서 터전을 닦았습니다. 여기에 아브라함과 롯의 상반된 선택이 나타나 있으니 그들이 택한 서로 다른 길이 선택의 중요성을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1. 아브라함은 믿음을 택했습니다

롯은 소돔 평지를 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부족의 족장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촌으로서 당연히 차지해야 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명령을 내린다고 해서 롯이 원망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권리를 포기하고 창 13:8에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라고 하였으며, 창 13:9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겸양의 미덕, 화평의 덕을 보인 것입니다. 독일의 관념론학자 철학자 헤겔(Hegel)이 1831년에 세상을 떠나자 헤겔 학파에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헤겔의 젊은 제자 스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 연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스트라우스는 헤겔의 철학을 복음서 강해에 적용하여 “복음서는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 아니고 하나의 신화이다”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즉 예수님의 이적은 거의가 신화에서 온 것이며 믿을만한 것은 산상보훈의 사랑의 설교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신성) 보지 말고 이웃 사랑을 실천한 역사적 인물로 보라는 것입니다. 이 논리의 도가니 속에서 헤겔학파는 세파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수하려는 우파와, 스트라우스의 주장을 따르는 급진파 좌파와 그리고 중도파였습니다. 좌파에서 일보 전진한 것이 마르코시즘, 곧 오늘의 공산주의 이론입니다. 좌파는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을 택했으며, 하나님의 진리 대신에 물질을 택했습니다. 롯의 선택이 바로 헤겔 좌파의 선택과 다를 바 없습니다. 롯은 처음에는 목양지로서 요단 온 들을 택하고 소돔 성에는 가까이 가지 않았습니다(11절). 그 다음에 농산물을 교환하고 여러 가지 편리를 보고자 평지 성읍 들에 머물렀습니다(13절). 그 다음 도시 생활의 편리한 것과 호의와 쾌락에 매혹되어 목양생활에 흥미를 잃어버리고 장막을 소돔성으로 옮긴 것입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목양지를 찾아나섰고, 그 다음에는 편리한 성읍을 찾더니 결국에는 장막까지 옮겨 본격적으로 소돔 시민이 되고만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은 헤브론을 택했습니다

(1) 롯이 아브라함을 떠났을 때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고 했습니다. 롯은 소돔으로 떠나고 아브라함은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조카 롯에게 모든 것을 다 양보하고 묵묵히 서 있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보신 것입니다. 눈을 들라고 하신 것입니다. 눈을 들어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만, 롯이 눈을 든 것은 롯이 세속에 치우친 자기 자신을 보기 위한 것이며, 14절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본 것은 하나님이 허락한 약속의 땅을 바라본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크게 대조되는 말입니다.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다 주리라”고 했습니다. 온유한 자는 이같이 기업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습니다. 롯은 육안이 비쳐진 현실의 소돔과 고모라만 보았지 그 문명의 미래를 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는지를 보지 못했습니다. 룻기 1장에 보면 베들레헴이 기근이 들었을 때 나오미는 그의 남편 엘리 멜렉과 두 아들 말론과 기혼과 함께 잘 살아보기 위하여 이방신이 있는 모압 땅으로 이주했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서 나오미는 두 아들을 잃고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자부 롯과 함께 베들레헴에 돌아왔을 때 나오미는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나오미(행복한 자)라 하지 말라 마라(고통)라 칭하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룻 1:20-21)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자의 최후 고백입니다. 희극으로 시작했다가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하나님을 떠난 자의 종착역입니다. 번영을 추구하기 위한 오늘의 문명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아니할 때 그 문명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쇠퇴와 멸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으며, 인류는 마라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2)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데 네 자손도 세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삶의 척도로 삼으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직 자식이 없었습니다. 사래는 고령이므로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믿은 것입니다. 삶이란 내가 살려고 해서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살도록 하실 때 잘 살게 되어지는 것이 신비로운 인간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롯처럼 약속의 말씀을 깜박 잊어버리고 나의 표준을 따라 선택하고 결단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는 신앙으로서 인내하면서 모든 것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3)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는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삶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은 공지가 아닙니다. 거기에는 가나안인, 브리스인, 그외 다른 민족들이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수 1:1-9에 “강하고 담대하라”고 거듭 여섯 번이나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발바닥으로 많은 땅을 다 주신다고 했습니다. 평양에서 선교하시다가 돌아가신 마포삼열 목사께서는 사택에서 원근간 다니시는 길은 모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지고 학교가 세워지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발바닥으로 밟은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증거 입니다. “네가 어디로 가던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라”고 한 이 말씀을 우리가 믿고 실천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동역자가 되어서 반드시 그 일에 참여 하신 다는 것 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처럼 선택의 척도를 “하나님”, “그의 언약”, 그리고 “행함”에 두고 소돔보다 가나안을 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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