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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상심한 자를 고치심 (시 147: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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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시 147편을 읽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 선함이며 찬송함이 아름답고 마땅하도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세우심이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를 모으시며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치료 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너무 크고 많으심으로 우리가 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은 특별히 마음 상한 자를 고치십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하시는 일이 많이 있지만 한 마디로 말해서 마음이 상한 사람을 고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오신 그 목적도 마음 상한 자를 고쳐 주시기 위해서 왔습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몸에 상처 입은 사람을 고쳐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반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손 마른 사람들을 고쳐주었습니다. 소경을 보게 했습니다. 절름발이를 걷게 했습니다. 중풍병자를 일으켰습니다.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마음에 상처 입은 자들을 고쳐주기 위하여 얼마나 힘썼는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하여 상한 인간을 아주 꺾어 버리지 아니하시고 회복케 하셔서 구원하여 주었습니다. 구약 이사야는 사람을 가리켜서 “상한 갈대”라고 하였습니다. 파스칼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였습니다. 펄벅 여사는 한국인은 “살아있는 갈대”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는 예언자적 입장에서 말한 것이라면, 파스칼은 철학적으로, 펄벅은 사회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갈대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갈대 자체는 약한 것인데 상한 갈대는 더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를 나타냅니다. 즉 인간성을 표시하는 것입니다. 과연 인간은 약합니다. 육신도 연약합니다. 곧 병들고 곧 피로를 느끼며 조금만 세월이 흐르면 노쇠하고 맙니다. 또한 인간의 이성도 나약합니다. 다윗 같은 성군도 범죄에 빠져 자신과 가정과 국가에 큰 화를 초래했습니다. 베드로 같은 제자도 사랑하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정한 사실들은 모두 인간의 이성이 얼마나 약한가를 말해줍니다. 또 약한 갈대는 개인적 인간성을 말하는 동시에 연약한 유대 민족을 상징한 듯합니다. 실로 유대 민족을 아브라함 조상때부터 유랑하였고 오늘까지 이스라엘 민족사는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상한 갈대는 상한 잡초가 아닙니다. 상했을지라도 잡초는 아닙니다. 갈대는 속이 비어 있습니다. 약한 바람에도 쉽게 움직이고 갈대 밭에는 고요한 밤대로 흡사 서로 이야기 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갈대는 약하지만 무엇인가 지닌 존재입니다. 약하지만 절망하지 않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나 무엇인가 되는 존재입니다. 이같이 상한 갈대는 우리 교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순교자의피 위에 세워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 한국 교회는 피의 순교자 위에서 성장했습니다. 20세기 최대의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그의 교회관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바 있습니다. 히틀러가 무서운 독재자로 등장하여 독일 민족을 엄청난 길로 몰고 나갈 때, 아인슈타인은 누가 히틀러의 미친 길을 가로막을 것인가 전망하였다는 것입니다. 먼저 독일 민중이 존경하는 대학 교수들에게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지성인들은 쉽사리 히틀러의 독재정치에 굴복하였습니다. 그 다음 그는 민중의 목탁인 신문 기자들에게 바른 말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독일 신문들은 붓을 모아 “히틀러 만세”를 불렀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완전히 실망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뜻하지 않았던 항거가 뜻하지 않던 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그가 평소에 무시하인 교회였습니다. 독일 교회는 히틀러의 독재에 항거하여 일어났고 수백 평의 목사들이 교회에서 감옥으로 끌러가 투옥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교회는 거인처럼 일어나 지식과 진리와 자유를 수호하였다. 나는 처음 교회를 경멸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한없는 존경으로 이를 바라본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죄인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회개시켜 하나님의 자비로 용서해 주십니다. 요 8장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군중들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주님 앞에 끌고와서 하는 말이 “모세의 법으로 말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선생께서는 어떻게 말하시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영혼은 문자 그대로 상한 심령입니다. 상한 갈대와 같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없는 자가 있거든 먼저 돌을 들어 저 여자를 쳐라”고 그러자 모두 흩어지고 그 여자와 예수만이 남았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를 정죄하던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느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돌아가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상한 심령을 고쳐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상할대로 상한 어거스틴을 불러서 그의 심령을 완전히 고쳐서 2,000년간의 기독교사상을 지배할 수 있는 위대 한 신학자로 만드신 것입니다. 상한 마음을 고쳐 주께서 귀히 쓰는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 주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빈궁과 실패와 병과 죄에 상한 사람들을 불러서 죄를 사해주시고 그 심령의 상처를 회복시켜 하나님 나라의 귀한 일꾼을 삼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배하게 된 것은 오로지 마음 상한 사람을 고치시는 우리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삭개오는 멸시받는 세리장이었으나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영접했으며 주님은 전능의 손으로 삭개오의 상한 심령을 고쳐 완전한 심령으로 만들고 “오늘날 너희 집에 구원이 있으렸다 너도 완전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고 하는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상한 심령과 깨어진 인격이 회복하고 고침 받을 수 있는 길은 우리 주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는 길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내 생활이 더러워지고, 내 마음이 죄로 인해 상처를 입고, 내 인격이 파산되었다고 할지라도 주님 앞에 나오면 고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건강한 사람이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상한 마음을 고쳐 주시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 교치는 정치, 철학, 과학 강연을 하지 않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마음 상한 사람이 고침받는 곳입니다. 여러분 중 마음 상한 성도가 계십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상한 마음을 고쳐 주시고 상처를 싸메어 줍니다. 그리고 참 안식과 행복을 주십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시고 살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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