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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윤리 문제 (딤전 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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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말씀은 성도의 일상생활과 일에 관한 지극히 중요한 원칙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 당시의 기독교인으로서 노예는 특별히 어려운 입장에 있었습니다. 불신자인 주인을 모신 노예는 그가 지옥에 갈 것이라는 생각에 우월감을 갖기 쉬웠을 것입니다. 반대로 주인이 기독교인인 경우는 주인이 기독교인이니까 사랑을 베푸는 사람으로 여기고 관용을 베풀어 주리라는 생각에 일을 소홀히 하고 규칙이나 벌을 빠져 나가려 했음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크고 작은 일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로마 제국에는 6천만명의 노예가 있었습니다. 그 같은 압도적인 숫자로 말미암아 노예라고 하는 것은 항상 가상적인 적이라고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노예의 반란이 있을 경우는 가차 없이 무력으로 진압했던 것입다. 로마는 노예가 봉기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노예가 도망갔다가 체포되는 경우는 처형하거나 이마에 F자로 화인을 찍었던 것입니다. 로마법에 보면 주인이 살해당한 경우 모든 노예가 고문당하고 한꺼번에 처형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기독교가 로마에 전파되었는데 교회는 노예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교회는 힘으로 다스리지 않고 억눌린 그들을 사랑으로 감싸 주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서서히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과 진리로 감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위험은 사랑과 포용만을 주장하다가는 성도들로 하여금 신앙을 핑계로 무의식적으로나마 나태함과 무능과 구실을 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도 크리스챤이고, 주인도 크리스챤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배려와 사랑을 기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 한 사실은 고용주와 고용인의 구별이 명확해야 다른 종업원들의 원망을 사지 않는 것입니다. 크리스챤도 남들과 똑같이 규율에 순종하고 적당한 보수를 받으며 착실하게 일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의무를 잘 감당해야 합니다. 만일 고용인으로 일하는 크리스챤이 매사에 부주의하고 게으르고 불순종하며 상관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면 그것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를 비판할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챤 일꾼들은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욱 착하고 열심히 일하는 일꾼이 되어 기독교를 빛내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생활에서 항상 그리스도의 향기가 우러나와야 하며 자신의 개인 생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교회의 얼굴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매사에 경건하고 겸손한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1. 윤리의 표준 요즈음 「파라독스(Paradox)의 진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는 역리의 진리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서쪽으로 향하여 계속 가다보면 마침내 동쪽이 나온다는 이야기와 같은 논리입니다. 윤리라는 말은 그 폭이 대단히 넓다고 생각됩니다. 가령 옛날과 오늘날의 윤리가 다르며 종족과 민족 그리고 국가 사이의 윤리적 개념의 차이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피상적인 윤리나 도덕을 생각해서는 아니 되며 구체적으로 행해지는 윤리는 어떤 것이며 그 표준은 무엇이냐 하는 근본문제부터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윤리문제를 크게 나누어서 동양윤리와 서양윤리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동양윤리에서는 유교적 윤리가 기본 바탕이 되며, 서양윤리에서는 그리스도교 윤리가 근본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두 가지 윤리의 표준만이라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1) 유교 윤리의 표준 유교 윤리의 표준은 인(仁)입니다. 공자의 인(仁)에 대한 해석도 많이 있지만 옛부터 인을 선행의 대의명분이라 하여 선행과 인을 동일시하였고, 어떤 사람은 인이 사람을 위대하게 하는 근본이라 하였으며 모든 백성을 평안케 하는 덕이라 하였으니 어진 임금이 즉위하면 백성들이 안전 하게 평화를 누릴 수 있다 하여 정치적 의미보다는 도덕적인 의미에서 인을 사용하였으며 혹은 선애(善愛)의 덕이라 하여 원근 각처에 덕을 끼치는 것이 인이라 하였습니다. "내가 서고자 하면 남을 먼저 세워주고 내가 잘하고자 하만 먼저 남을 잘하게 하고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자신에게 대해서는 사리사욕을 극복하는 것이요 밖으로는 후대하여 안으로는 각박한 것을 멀리하며 마음의 근심을 버리고 하늘의 뜻에 따라 사는 기쁨이 인이라 하였습니다. 맹자는 仁(인)에다 의(義)를 더하여 윤리의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만인을 무차별적으로 대하며 선에 상을 주고 악에 벌을 주어 법을 공정히 행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인과 의가 합하여 질 때 이를 덕(德)이라 하였습니다. 그 당 시 양주(楊朱)는 개인주의 윤리를 내세워 자기의 머리털 하나를 뽑는 것이 만백성에게 유익이 된다 해도 머리털은 부모의 것이니 효를 행하는 자로서 결코 머리털 하나라도 희생할 수 없다는 개인주의 윤리관을 주장하였으며 묵자는 겸애설로써 만백성 모두 내 부모, 내 형제 자매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윤리관을 설파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동양의 대표적 윤리관은 맹자의 인의(仁義)를 윤리의 표준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그리스도교의 윤리 기독교 윤리의 표준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평면적이면서 입체적인 것입니다. 유교가 사람의 도(道)를 내용으로 한다면 기독교는 천도(天道)가 중심이 되며 윤리의 표준은 유교와 비교할 때 하늘과 땅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 1:1에 "태초에 말씀(道)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일 4:8에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속성이며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화신이며 사랑의 화신으로 오셨고 그리스도의 교훈 중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윤리를 가리킨 것입니다. 사랑은 도덕의 기준이요 만법의 근본이니 사랑은 동서고금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우리의 표준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각 민족마다 풍습이 다르고, 윤리가 다르고, 법이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옛날에 나라의 주인은 군주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백성이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윤리의 표준마저 흔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가 변하고, 정치가 변하고, 법률이 변할지라도 근본적인 사랑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덴마크의 구룬트비 목사가 이 윤리를 기초로 하여 애신(愛神), 애인(愛人), 애토(土)의 구호 아래 북해 사막의 땅을 옥토로 만들었고 북방 민족의 야만성을 신민화(神民化)시켜 지상천국을 건설하였다는 사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2. 윤리 생활 윤리 생활은 윤리의 표준을 입으로만 외치고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게 중요한 것입니다 윤리는 신행(神行)에 의한 생활이어야 참된 윤리의 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리스도인의 건전한 생활은 신앙과 실천이 병행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중 어느 것 하나라도 결함이 있으면 절름발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성경 중에 사도 바울의 믿음에 의한 참다운 의와 야고보 장로의 행위에 대한 실천의 교훈을 잘 조화시켜 신행합일(神行合一)에서 참된 윤리 생활을 이룩해야 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이라면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신행합일(神行合一)을 강조하나니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의 윤리 생활이라 할 것입니다. 믿음은 절대성이요, 행위는 상대성 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먼저이며 그 다음이 행위입니다. 즉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에는 항상 행함이 따라야 온전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먼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선행시키는 것이 원칙이지만 반드시 병행에서 행동이 뒤따라야 한다는 의미에서 신행합일(神行合一)이라는 신학 술어까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 기독교인들은 사랑을 바탕으로 한 신행합일의 윤리를 각별히 유념하여서 실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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