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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을 찾으라 (시 3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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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물체도 빛이 없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비록 두 눈을 가졌다하더라도 눈만으로는 물체를 볼 수 없습니다. 빛이 없는 어두움 속에서는 모든 것이 어두움에 쌓여 있고, 그 모양을 알아 볼 수 없습니다. 우리의 심령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어두운 면이 있고 밝은 면이 있습니다. 어두운 면에서 사는 것은 빛을 떠나 있는 생활이고 그 빛 없는 생활 속에서는 삶의 진정한 모양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성서에 보면 우리 주 하나님 또는 그리스도를 빛이라 하고, 그 하나님 안에는 어두움이 없다고 합니다. 요 8:12에 보면,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요”라고 씌여 있습니다. 어두움 속에서는 죄와 실망과 죽음과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어두움에서 사는 사람은 무엇이 밝은 것인지, 무엇이 어두운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시편 36편은 하나님은 우리의 빛이시며, 그 빛 속에서 사는 사람과 하나님을 떠난 빛없는 어두움에서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대조하여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시편 36편 1-4절까지는 하나님을 떠난 어두운 생활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언제나 죄짓는 생각이 마음에 있고 눈앞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한 죄를 미워하지도 않으며 자신의 죄도 모르고 그의 말은 죄와 죄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하여 침상에서조차 죄지을 궁리를 하며 스스로 악의 길에 섰으며, 악을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요약해서 말하면 죄의 어두움에서 사는 사람은 모든 것이 어둡고 죄가 무엇인지 의식조차 못하고 사는 생활 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빛 속에서 사는 밝은 생활이 5-9절까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빛 속에서 사는 생활은 높은 하늘과 넓은 공중에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충만한 것을 알며, 주님의 의로움은 산과 같이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판단은 넓은 바다처럼 관대하시며, 주님께서는 사람과 짐승을 보호하신다는 것을 믿는 생활입니다. 그러므로 빛 속에 사는 생활은 주의 인자하심이 귀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날개 안에서 안식과 보호를 찾는 믿음의 생활입니다. 어린 새가 어미의 날개 밑에서 안식과 평화를 찾듯이 하나님의 빛 안에 사는 생활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생활입니다. 마지막으로 빛을 보고 사는 생활은 삶의 근원인 하나님을 믿으며 주께서 주시는 은혜와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삶을 사는 생활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생활의 빛은 어디에서 오는 것입니까 성서는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빛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빛이 있는 곳”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의 빛 되심”에 말하고 있습니다. 요 8:12에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요 12:35-36에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는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리라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는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러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고 씌여 있습니다. 빛의 아들은 어두움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빛을 받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과 사귀고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사람이, 언제나 죄와 소망 없는 슬픔이 있는 어두움 속에 산다면 빛의 아들이라 할 수 없습니다. 멸망의 어두움 속에서 반짝이는 구원의 빛을 바라보고 살 때 우리에겐 영원한 삶이 약속되는 것입니다. 수년 전에 강원도 어느 광산에서 광산이 무너져 많은 광부들이 죽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 나왔습니다. 그 살아나온 광부는 무너진 광산 안에 전화가 통화되고 전기불이 꺼지지 않은 것을 바라보면서 자기는 살아나올 수 있으리라고 믿었고, 그 희미한 빛이었지만 꺼지지 않은 전기 불을 바라보면서 살아 나왔다는 말을 신문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탄광 굴 안에 있는 전기 불을 보고도 삶의 소망을 버리지 않고 사는 길을 찾았습니다. 하물며 모든 생명과 우주 만물의 창조주 되시며 이 세상의 빛 되시는 그리스도를 우리는 믿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요 1서 1:5-7에 보면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저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죄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씌여 있습니다. 이렇듯 빛 속에 사는 생활은 죄의 어두움을 이기고 사는 생활입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요, 빛의 생활의 결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입니다. 죽음에 사는 사람은 빛을 보지 못하며, 빛 속에 사는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빛 안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의 고귀함과 인자하심을 찬양하고, 믿음 안의 기쁨과 복락을 알 수 있습니다. 빛 속에서 사는 사람은 삶의 아름다움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우리 각 개인의 생활 속에는 각자 아름다운 삶의 모습들을 그려가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파리는 세계 미술의 도시라 할 수 있을 만큼 좋은 그림이 많이 나오고 또 세계 미술 사상에 이름을 떨친 대부분의 화가들이 프랑스 출신이며 프랑에서도 파리 출신들이였습니다. 지금도 파리에 가보면 많은 화가들이 곳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세느강변에서 많은 화가들이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서로들 그림을 괄고 사고합니다. 이런 화가들 중에는 전통적인 사실주의파 화가가 있는가 하면 자기 눈에 보이는 그림의 인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이른바 현대파 화가가 있습니다. 일본 어느 유명한 화가가 해변의 항구를 그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그림이 아니요 연필로 둥굴둥굴하게 돌리면서 그린 알 수 없는 낙서입니다. 그래서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보고 있으니 그 화가는 말하기를“조금 떨어져서 이 그림을 보셔요” 하면서 내가 설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지적해 준 위치에서 보니 알 수 없었던 낙서 같은 그림이 항구에 있는 배들의 모습임을 알 수 있었다. 가까이에서는 알 수 없던 그림이 조금 떨어짐으로 그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가까이에서 보면 어두움으로 가득 차서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삶 자체만을 보면 어두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은 그래서 허무주의 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위의 화가의 그림은 거리를 멀리하여 빛의 조화 속에서 그 모습을 볼 때 그 모습이 드러나듯이 예수님이라는 빛에 우리의 삶을 비추어 볼 때, 뿐만 아니라 그 예수님으로 인하여 삶에 대한 잡착과 욕망을 버리고 삶에 거리를 두고 초연할 때 우리는 삶을 깨달아 알게 되고 비로소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요즈음은 물질문명이 극도로 발달했습니다. 이와 병행하여 우리의 오관과 관능을 자극하는 온갖 것들이 우리를 현혹시킵니다. 사람들은 불나비처럼 쾌락에 현혹되어 어두움의 생을 살고 있습니다. 삶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고 의미를 추구하지 않으며 미몽에 사로잡혀 생활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의 어두움을 비추어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빛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빛이 됩니다. 그 빛은 다른 사람들에게 비추는 것, 그것이 빛의 아들들의 일입니다. 빛을 찾고 그 빛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 때 삶은 찬란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음이 감히 어찌할 수 없는 생명입니다. 그 영원한 생활을 호흡하며 빛 가운데 생활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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