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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인의 울음 (눅 06: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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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가 기록한 예수님의 평지에서의 설교와 산상에서 행한 산상보훈(마 5-7장)과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모두 행복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태의 팔복이나 누가가 기록한 복은 각기 몇 가지 부분이 다르지만, 다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글자 그대로 종래의 기준들을 완전히 뒤집어 놓고 있습니다. 예수가 복되다고 말한 사람들을 세상에서는 불쌍하다고 말한 사람이며, 예수가 불쌍하다고 말한 자는 세상에서는 행복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부한 자가 불쌍하다”고 말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힘으로써 감화를 통해 세상의 기준을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의 영원한 선택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신앙에 대한 선택입니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평생토록 믿을 신앙을 선택하였습니다. 우리들은 안이하고 눈 앞에 보이는 일시적인 쾌락과 이익을 가져오는 길을 택한 것입니까 혹은 당장에는 어려움이 많고, 때로는 고난이 닥쳐올지라도 그것을 각오하고서 신앙을 택한 것입니까 우리는 순간적인 기쁨과 이익을 위해서 신앙을 버릴 것입니까 세상의 보상에 집착할 것입니까 아니면 그리스도에게 마음을 쏟을 것입니까 세상의 길을 택한다면 그리스도가 지닌 여러 가지 가치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님을 택하는 것은 최후에 얻을 영생의 복을 택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산상보훈에서 하늘나라의 헌장을 반포하실 때에 하늘나라의 축복의 길을 여덟 가지로 말씀하셨는데, 그 둘째로 애통하는 자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사람은 본래 아담의 원죄에서 오는 환란, 고통, 비애의 쓴 잔을 면키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비통의 울음을 경험치 않은 자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인간은 울음이란 것을 모르고 항시 희희낙락하며 지내기를 절원해 마지 않습니다. 결코 저들은 우는 자를 행복한 자라고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실로 역설적인 교훈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사람이 울어야 할 울음이 무엇이겠습니까 복된 울음이란 어떤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1. 참회의 울음입니다 시 6:6에 “내가 탄식함으로 곤핍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라고 한 다윗의 통곡이 있습니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취한 것을 뉘우치며 심히 울었던 것입니다. 마 26:75에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니라”고 한 베드로의 애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니 내가 뉘게로 가오리까”,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내가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대답했던 베드로도 주님의 예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인자하신 주님께서 멀리서 그를 돌아보시니 비겁한 마음에 가책을 받아서 마음이 아파 울었습니다. 스 10:1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되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이스라엘 중에서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의 큰 무리가 그 앞에 모인지라”는 것에서 에스라와 그의 백성의 통곡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사의 아닥사스 왕 때에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 백성들과 함께 돌아온 학사이자 제사장인 에스라는 어느날 방백들이 나와서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일을 취해서 아버지와 며느리를 택하여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백성들과 두목들이 으뜸이 되었다”고 보고한 일이 있습니다. 이때 에스라는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았다가 저녁에 제사드릴 때에 근심 중에 일어나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로 무릎 꿇고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러워서 낯이 뜻뜻하여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로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오니이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민족적 죄악을 통곡했습니다. 우리 개개인에게 다윗과 베드로의 죄가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국가와 교회에 에스라 시대의 죄악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육체의 환락을 위해, 생명의 안전을 위해,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할 줄 모르는 데에서 우리와 우리 지도자들의 죄악이 허다함을 자인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고대의 죄악의 도성인 니느웨는 요나를 통해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을 때에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온 백성이 참회의 눈물을 흘림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300년간의 사사 시대 때에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대하여 참회의 눈물을 흘릴 때마다 긍휼을 입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들도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민족적으로 참회의 울음을 울 때 이로써 하나님께 위로와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2. 감격의 애통입니다 느 8:9에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고 한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생활에서 자유를 얻어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 수문 앞의 광장에 모였을 때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율법을 낭독하니 무리들이 손을 들고「아멘」소리로 응답한 사건과 연관된 구절입니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추악한 인간계로 사람들을 구할 사명을 띠시고 탄생하시어 30여 년간을 빈곤과 고독과 멸시와 천대와 배신과 고뇌 가운데에서 빈자와 불구자와 죄인들의 친구로 지내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상에 피흘려 그 생명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극치의 사랑을 우리는 눈물없이 감동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나 자신이 당시 예루살렘 시민이었다면 악당들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으리라! ”고 외치지 않았을 것인가고 생각할 때에 그 십자가에 대한 감격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어찌 감격의 눈물 없이 골고다를 쳐다볼 수 있겠습니까 찬송가 가운데 “늘 울어도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라는 기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의 태도로서 그리스도에 대해 감격의 울음을 울어야 할 것입니다.

3. 연민의 애통입니다 렘 9:1에 “어쩌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내 살륙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렘 9:10에는 “내가 산들을 위하여 곡하고 부르짖으며 광야 목장을 위하여 슬퍼하나니”라고 하였고, 렘애 1:2에는 “밤새도록 애곡하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 중에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렘애 1:16에는 “이를 인하여 내가 우니 내 눈에 눈물이 물같이 흐름이여 나를 위하여 내 영을 소성시킬 자가 멀리 떠났음이로다 원수들이 이기매 내 자녀들이 외롭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민족의 비참과 예루살렘의 참상을 보고 운 예레미야의 통곡입니다. 주님께서도 감람산에서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시면서 심판받을 것을 예언하시며 통곡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얼마나 애타게 지켰느냐.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향해 가시던 주님께서는 뒤따르는 여인들을 향해서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눈물이 다 말라 버렸는지 이웃과 더불어 울 줄도 모르고, 동포의 비참사를 보고도 냉담하며 동정의 표시를 그리 나타내지 못합니다. 주님이 구원해 주시는 사랑에 감격해 하는 눈물을 흘립시다. 죄를 회개하는 애통의 눈물을 흘립시다. 이 민족이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 받을 것을 생각하며 연민의 울음을 웁시다. 성경은 애통하는 자를 향하여 이렇게 위로하십니다. 시 126:5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고 했으며, 시 6:8에는 “행악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곡성을 들으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시 30:5에는 “그 노염은 잠간이요 그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고 했으며, 대하 34:27에는 “하나님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희열의 웃음이 있는 반면에, 이상에서 본 울음이 병행하여야 합니다. 영원한 웃음을 소유하려면 계속되는 애통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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