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수난과 영광 (고후 04:11-13)

첨부 1


본문의 말씀에 바울 자신은 연약한 육신의 고난이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었다는 체험을 밝히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바울 뿐만 아니라 예수의 제자된 자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을 그 몸에 짊어져 예수의 당하신 고난을 함께 담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자는 예수의 부활과 영광, 생명을 함께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요 부활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예수의 십자가 예수의 생애는 베들레헴 말구유에 나실 때부터가 수난의 기록으로 시작됩니다. 사생애는 물론 공생애 3년간 어느 하루도 수난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기쁨을 전하건만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그를 박해했습니다. 끝내는 빌라도의 심판을 거쳐 갈보리, 언덕 위에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그 수난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그의 고난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줍니까 (1) 성육신 (Incarnation)은 자기 비하를 가리킵니다. 왜 성육신이 되었겠습니까 죄많은 인류를 구속키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탄생할 때에 이 세상의 가장 비천한 말구유를 택하시고 수난을 자처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그의 생을 주린 자, 병든 자, 슬픈 자, 버림받은 자, 죄인들의 친구로 보내신 것입니다. (2) 광야에서 받으신 수난(마 4:1-11) 주님은 공생애 출발에 40일의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몹시 시장하신 고난의 시련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그의 사명에 회의를 품게 하려는 시험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소명을 의심하게 되면 모든 행동이 마비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자기가 하려는 일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자기가 말은 사명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생각하시므로 시험을 물리치시고 모든 일을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으로 순종할 때만 이루어질 수 있음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3) 제자들에게 배신당하는 수난 제자들에게 배신당할 때처럼 비통할 때가 없을 것인데 예수께서는 3년을 하루같이 가르쳐왔던 열두 제자들에게 배신당하셨습니다. 그 배신 앞에 스승된 예수님의 심정은 어떠하셨겠습니까 (4) 십자가상의 수난과 죽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당한 육신의 고난, 영적인 수난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는 잡히시던 날 밤에 여섯 차례나 고문을 받으셨고 수없이 조롱을 당했으며. 또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까지 가셨고, 거기에서 그의 손과 발에 쇠못이 박혔던 것입니다. 끝까지 고통을 참으신 주님은 눅 23:46에 “나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하시며 기도하시고 숨을 거두시었습니다. 우리 죄 때문에 물과 피 한방울도 남김없이 다 쏟으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이 고난은 고난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장엄한 승리의 영광으로 나타났습니다.

2. 부활의 승리와 영광(마 28장)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구속해 주셨고, 부활하심으로 의롭게 하사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1) 부활의 역사적 승리 본래 십자가는 고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고난을 지심으로 인간의 모든 고난을 한 데 묶어 죽음으로 장사지냄으로 인간의 고난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하나의 묶음표 안에 넣고 그 내용을 한꺼번에 변화시켰던 것이니 고난 대신 기쁨으로, 투쟁 대신 화해로, 모순 대신 조화로, 죽음이 새 생명으로 바꾸어짐으로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이루어 놓았습니다.

3. 사도피의 수난과 영광 바울은 본문에서 자기가 사도직을 받은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은 것이며, 자신의 힘으로 되거나 어느 누구의 소개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도직의 영광이 모세의 영광보다도 나은 것을 알면서도 한편 이를 받아들인 사도 자신의 육적 약함과 추함을 볼 때 이 영광의 직을 담을 그릇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릇의 낮은 것으로 그 안에 담긴 내용 자체까지도 천시하는 것은 잘못이며 도리어 그곳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 복음의 위대한 힘은 사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있으므로 하나님만을 존귀히 하기 위하여 이렇게 낮은 질그릇에 곤 보배가 담겨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만을 높이 나타내는 사도, 그리고 그 보배를 존귀히 나타내지 않는 사도는 참 사도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육체의 약하고 추함과 많은 변란이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까닭인 것을 그의 체험을 통해서 알았습니다. 우리가 사도직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므로 누구나 자기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난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이 길을 외면하거나 포기할 것이 아니라 이 길을 영광의 길로 알고 영광의 자리에 당당하게 동참하여야 할 것입니다. 바울이 영광의 사로직을 맡을 때 자신은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 하였으니 나같은 자야 더 만삭되지 못하고 난 자일 것이며 자신을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라고 했으니 나같은 자는 얼마나 작은 자이겠습니까 나같이 못난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당치 않을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옳게 여기고 소명하여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겨 주신 것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