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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인의 생활 표준 (롬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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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대는 패역한 세대, 노아 시대와 같은 무신론 시대이며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하나님 없이 생활하는 진정 무서운 무신론 시대이기도 합니다. 이성의 욕구대로 육체의 안목과 정욕대로 살아가려고, 마치 키를 끓은 무변대해의 일엽편주와도 같이 아무 규범도, 목표도 없고, 소망도 붙이기 어렵게 된 세대입니다. 이 세대는 하나님을 떠난 세대입니다. 이 세대는 양심이 무너진 세대입니다. 선악을 분별하는 양심을 마음에서 몰아내고 마음의 중심을 쓸어버린 현대인은 형제간 사제간의 윤리나 도덕 의리가 없고 다만 자기 배만 위하는 일념뿐입니다. 뇌물로 문제처리를 해버리고 공장에서는 그릇된 상품을 만들고 속이고 좀도둑 공무원은 그릇된 처사로 사는 이런 사회는 불안, 공포, 불신, 증오, 지옥 상을 그려 놓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현대인은 생의 가치를 모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어서 귀한 것입니다. 희랍인은 사람의 가치를 지식에서 구하였고 고린도인은 생의 가치를 향락에서 구하였고 로마 사람은 권세에서 생의 가치를 구했으나 인간은 그 가치가 지식이나 향락이나 권세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이 귀한 모습을 다 잃어버리고 짐승 같은 육 본위로 되돌아갔습니다. 양심도 잃어버리고 하나님과 교통하던 은혜의 길도 끓어버리고 악하고 추한 자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타락된 자리에서 다시 본모습으로 되돌아와야 귀한 사람의 본 위치로 돌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회개하여 죄사함 받고 성령으로 재창조되어 다시 하나님의 창조하신 본모습으로 복귀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이 불의가 승하는 세대에 비해서 저 의로운 세계, 이 부패한 세계에 비해서 저 아름다운 세계, 이 죄악의 세계에 비해서 저 선한세계, 저 마귀가 주장하는 세계에 비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계, 부패한 세대에 비해서 진선미의 생명이 넘치는 세계, 이런 대조적 의미에서 저 세계에 소망을 두고 살라는 말입니다. 그 세계를 소망하는 기독교인들은 장차 불타질 장망성을 본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적극적인 의미에서 이 도덕과 윤리가 부패한 세상에 있어서 소금이 되고 암흑한 세대에 있어서 빛을 비추며 이 혼돈한 세대에서 지침이 되며 구원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희랍정교회의 전설 중에 카디너스와 니콜라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님을 찾아 뵈오러 가는 두 사람은 세마포 횐 두루마기를 입고 길을 가던 도중에 큰 수레바퀴가 구렁 창에 빠져 고생하는 노동자를 보았습니다. 그때 카디너스는 주님 뵈올 흰옷이 더러워질 것을 염려하여 그저 지나서 먼저 주님 앞에 갔습니다. 이를 아시는 주님께서는 그저 온 것을 책망하시며 “나는 네 깨끗한 겉옷보다 착한 마음과 그 행실을 원하노라” 하시고 그저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늦게 왔을지라도 겉옷을 벗고 땀 흘리면서 어려움 당한 자를 구출하고 온 니콜라스를 보시고 크게 칭찬하시며 금 의자에 앉히우시고 큰 상을 베푸셨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요구가 무엇인지를 알아 그의 기뻐하시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자는 사도 바울의 깊은 뜻을 다시 음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의 어떤 교파는 한국에 와서 집진마다 길거리마다 다니며 열심으로 포교합니다. 얼마나 경건한지 술 담배, 커피, 코카콜라까지도 마시지 않습니다. 보수주의입니다. 그런데 그들 모두 처첩들을 3-5명씩 두고 삽니다. 밖으로는 엄격한 종교생활을 하면서 뒷전에서는 가장 비도덕적인 생활을 하는 너무나 큰 위선과 허위가 깃들어 있습니다. 믿음 그것 때문에 세계와 물질을 부정하면서 비밀히 세상적인 것에 아부하고 있습니다. 보수주의라 하면서 실상 하나님보다는 자기들의 신앙과 교리의 고집을 신으로 삼고 그 고진의 노예가 되기 쉬운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극단주의적인 자유주의는 하나님보다는 이 세상의 삶을 더 중요하게 보는 위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한국교계는 이 두 극단의 보수와 자유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이외의 신앙형태는 힘이 없거나 냉랭하다는 이유로 외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주의의 어느 하나에 속해야 마치 신앙을 가진 자처럼 생각하는 주체성 없는 신앙인들이 되어버렸습니다. 바울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알라고 했습니다. 이 귀절은 금욕주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구절 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의사는 금욕주의의 말은 아닙니다. 누구나 이 땅에 있으면서 세계를 떠나서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양식을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가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웃과 사회와 국가라는 공동체의 보호와 관계를 떠나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사람은 땅을 밟지 않고서는 새로운 무엇이든지 창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의 이름으로 이 삶과 현실을 외면하는 것은 죄가 됩니다. 종교의 도피주의는 여기서 수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이 삶을, 삶의 엄숙한 현실을 아름다웠던 이 세계를 인간이 가졌던 욕망으로 파괴하고 못살게 만들고 있는 악한 이 세대의 정신을 본받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기독교인은 똑같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세상과 투쟁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인생 연극을 남의 일처럼 관람하고 있는 무관심자도 아닙니다. 하나님 뜻을 복종하여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여 가는 변화에 참여하는 자들입니다. 기독교인에게는 사업이나 출세, 경쟁에 반드시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나 실패를 당했을 때 오히려 그 실패를 하나님의 훈련의 기회로 인식하고 그 실패를 뛰어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에게 손해가 될 줄 알면서 사랑과 도움이 요청되는 그곳에 투자할 수 있는 용기의 사랑을 말합니다. 기독교인은 세상에 있으나 세상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이 세상을 변화하는 일에 적극 참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기독교인의 생활은 그 신앙에 그 생활입니다. 기독교인은 신앙은 신앙, 생활은 생활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인의 생활이 교회 안에서 사는 생활과 가정에서 사는 생활이 다른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어디까지나 그 신앙에 그 생활입니다. 기독교인의 생활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짐 받은 무리들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감사생활이 있어야 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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