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광야의 소리 (막 01:1-8)

첨부 1


옥토가 없는 유대 땅은 광야뿐입니다. 선조 대대로 물려받은 이 땅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동경되었지마는 사실 메마른 광야만이 그들의 유업이었습니다. 이 땅이 아름답고 좋다고 신명기 기자는 꿀과 젖이 흐르는 땅이라고 그렇게 여러 차례 말했지만 들짐승조차 살 수 없는 광야가 선조들에게 약속된 땅이었습니다. 제 2차 대전 이후 잃은 조국의 꿈을 도로 찾기 위하여 학대와 학살을 당하면서도 찾아온 이 유대인의 당은 허허로운 광야뿐 이었습니다. 일찌기 아브라함의 첩 하갈이 주인의 아내에게 쫓겨나와 나이 어린 자식 이스마엘을 데리고 브엘세바 광야에서 방황하였습니다. 가죽부대에 담았던 물은 다 떨어졌는데 어린 자식은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차마 기갈증 때문에 숨이 넘어가는 자식을 바라볼 수 없어서 그 자식을 한 떨기나무 밑에 버려두고 죽는 것을 외면하고자 했습니다. 멀리서 그 아들의 모습만 바라보고 그 어머니도 방성대곡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시 물이 없어 하나님을 원망했던 광야이기도 합니다. 모세를 통해 반석에서 생수가 터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하다 독사들이 물어서 독사에 물려 죽은 광야이기도 합니다. 광야는 이렇게 절망과 죽음만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러한 광야에서 한 소리가 나왔다고 하는 본문의 말씀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이사야 40장에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여 너희는 광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자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낮아질 것이요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며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고 했습니다. 광야의 목소리는 너무도 뚜렷한 목소리입니다. 이 목소리에는 어떤 단순한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듣는 사람의 혈관의 피를 뜨겁게 해서 그의 전신의 신경과 근육을 어떤 사명감으로 긴장케 합니다. 광야는 이렇게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에 절망과 불안, 공포와 죽음만이 도사린 곳이었지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그의 능력과 구원을 몽땅 이 광야에서 경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광야는 기적을 나타낸 곳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난 곳입니다. 광야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구체적으로 펴진 곳이었습니다. 광야는 목마른 곳만이 아니요 흘린 눈물을 씻어주신 곳이요 광야는 막혔던 그 장벽을 헤치고 새로운 길을 열어준 곳이었습니다. 광야는 비록 적막한 곳이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곳이요 광야가 비록 고독한 곳이나 여호와 자신이 함께 하셔 주시는 곳이요 광야가 비록 다음 순간을 알 수 없는 곳이나 여호와 하나님의 깊은 뜻이 숨겨져 있는 곳임을 알 수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신앙 전승은 줄기차게 광야에서 들을 수 있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 전통과 역사를 다 내어버리고 그 하루하루의 삶을 위하여 절조와 지조를 팔고 고달픈 수치의 삶을 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그 백성이 가야할 길도 없었고 그들이 쳐다보고 즐길 꽃도 없었고 그들의 수난과 수치를 위로해 줄 인정의 샘터도 없었고 내일을 새롭게 약속해 줄 소망도 없었습니다. 메소보다미아의 거친 들에서 부어오는 북풍이 거세어 순간마다 못 견디게 했고 그들의 삶의 앞길을 어둡게 했습니다. 진실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이 죽음의 광에서 위로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사실 예루살렘 성이 적군의 말발굽에 짓밟히고 그 성이 불타 잿더미가 되고 그 원수들이 성전에 꾸민 금은보화를 탈취하기 위하여 산림을 도벌하는 나무꾼과 같이 도끼를 들어 성전 조각품을 부수려 들 때 이 미 그 백성의 위로는 떠나갔습니다. 조국을 잃음과 함께 바벨론 포로인의 신세로 사는 그들의 삶의 터전은 광야의 삶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언자의 사명은 바로 이러한 절망의 광에서 소망을 외쳐야만 했던 것입니다. 곧 위로의 메시지였습니다. “위로하라 위로하라 내 백성을” 아주 간결한 말입니다. 아래로 인간의 위로가 다 끊어진 때 위로부터 하나님의 위로가 내리는 것입니다. 역사의 광야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위로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 위로는 신 40:3 이하에 나오는 하나님의 새 역사 활동에 대한 확신이었습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광야는 인간의 길이 막힌 곳입니다. 어느 방향으로라도 갈 수 있는 광야는 실상 아무데라도 갈 수 없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곳이라면 실상 광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광야는 사람의 가능성이 끊어지고 악마의 혼돈이 지배하는 곳입니다. 예언자의 예언의 소리가 들린 지 5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런데 유대 광야에 또 다른 예언자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목소리의 주인은 약대 털옷을 입고 석청과 메뚜기를 먹는, 문화를 외면한 야만인이었습니다. 그도 하나님의 목소리를 갈망하여 새 질서의 길을 열어 보고자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귀는 마음의 음성에 예민했고 그의 눈은 낡은 세대의 종말을 보았고 그의 촉감은 오시는 메시야의 옷깃에 접하고 있었습니다. 이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고 이 사막에서 그의 손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켰고, 그는 스스로 예수님의 신들메를 풀기에도 감당 못한다고 할 만큼 자신을 낮추며 심지어 예수님은 홍해야 하고 자기는 망해야 한다고까지 말하며 자기 뒤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광야에서 살고 있었던 그 야인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음탕한 죄인 살로매를 인하여 그의 목숨이 제물로 바쳐진 것도 위대한 순교의 죽음이었지만 이 메마른 유대 광야에서 과거의 모든 예언자들이 말씀한 그 메시야의 오심을 알리는 일이 더 위대하다고 하겠습니다. 광야의 소리는 그 반응의 메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광야의 목소리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의 소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천만 성도들의 가슴에 살아 있습니다. 유대 광야에서 외친 장차 오실 메시야를 증거 한 그 목소리에 의한다면 우리나라를 에덴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광야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가요곡 황성옛터의 노래가 깊숙이 민중 생활 속에 파고들만치 한국인의 생활은 광야의 생활입니다. 모든 것이 처참하고 모든 것이 암담하고 모든 것이 절망적입니다. 아무도 예측 못할 불안의 구름이 우리를 덮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필요하다면 이런 광야에서 필요합니다. 예언의 외침이 필요하다면 바로 이 광야에서 필요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광야의 소리로 사라지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슨 소리를 이 광야에서 외치려 합니까 광야에서 신음하고 있는 이 백성에게 줄 만나는 우리 손에 준비되어 있으며 그들에게 마시울 샘물은 준비되었습니까 혹은 여호와의 길이 준비되었습니까 “외치는 자의 소리여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