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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해골 골짜기의 소리 (겔 3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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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생활로 고생하는 유대 백성들, 그리고 압제자들의 채찍밑에서 한 해 두 해 십 년 이십 년 지나는 동안 해방의 희망도, 의욕도 정열도 지쳐버렸습니다. 모두 그들은 절망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좌절과 허무와 의욕 상실 등이 그들로 하여금 하루하루 생활 안일과 향락만을 원했고 동물적인 생활을 만족하게 여겼습니다. 유대 민족은 용기와 정열을 잃었으니 동물적인 이기주의와 감정적 갈등 과 현실적 분열 투쟁‥‥‥ 그런 것만이 자연히 그들이 생활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겔은 말을 잃었습니다. 포로된 동포들의 심정을 이 해하면 할수록 그에게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답답할 뿐이었습니다. 내일 을 가지지 못한 어두운 절망‥‥거기에 할 말이 없습니다. 무슨 혀의 기교가 효과를 거두겠습니까 그의 입이 열려지지 않으니 그는 자연히 다른 세계를 향하여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가 본 환상이었습니다. 그의 눈앞에 전개된 환상은 무엇입니까 에스겔은 해골 골짜기를 시찰한 다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는 질문과 아울러 이 뼈들에게 대언하라는 명령에 따라 대언하였더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라고 했습니다. 지금까지 적막과 침묵에 잠긴 골짜기는 음향을 발하고 물체 하나 움직이지 않고, 정지되어 있던 골짜기는 운동력으로 변하여 순식간에 연결운동과 조직운동을 일으켜 마른 뼈들은 완전한 인간의 육체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1. 대언하는 소리입니다 (1) 대언자의 성대 예언자는 성우가 아닙니다. 또한 코메디 배우가 아닙니다. 남의 음성을 흉내를 내는 자가 아닙니다. 금은 맥기가 필요 없고 나팔은 금 은으로 만들지 않아도 됩니다. 복음은 내용이 중요한 것이지 인위적으로 거룩한 체 하거나 누구를 닮으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계적인 대설교가 스펄젼은 “성대에 너무 지나친 신경을 쓰지 말고 조용하게 때로는 크게 굴곡있게 사용하라”고 그의 저서에서 말했습니다. 사42:1-2에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 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40:2-6에 “외쳐 고하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외쳐 고하라”고 했습니다. 진리는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큰 소리로 소리 높여 외쳐 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설교의 말씀은 이슬 같이 봄비와 같이 내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뇌성벽력 치면서 내리는 폭우 같이 쏟아지기도 합니다. 여름 폭우가 쏟아질 때 비만 내리는 것이 아니라 뇌성벽력을 발합니다. 비가 쏟아지려면, 우르르 쾅쾅 번쩍 번쩍해야 스릴이 있고, 멋이 있고 비오는 것 같습니다. 뇌성벽력을 치 는데 비는 없습니다. 음성은 고래고래 큰데 은혜는 없습니다. 내용이 있고 소리가 중요한 것입니다. (2) 대언자의 능력 똑같은 성경본문을 가지고 두 사람이 똑같이 설교하는데, 한 사람은 은혜와 감동과 힘이 있고, 한사람은 맥 빠진 설교입니다. 힘있는 설교자가 되려면 병들어 죽고 매장하고 송장된 자리에서 부활 체험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자신이 회개, 중생, 은혜 체험이 있어야 합니다. 고전 4:20에 “하나님 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오직 능력에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능력에 있 음이라”는 말은 도덕적 능력, 정신적 탁월성, 영적 실력 기초 위에 섰느니 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미사어구 수식어 감언이설을 가지고도 일시적으로 인심을 유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 건설에는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바울은 웅변가는 아니었으나 고후 11:6-10에 그의 설교의 능력은 다메 섹 도상에 엎드러져 “주여 어찌 하오리까‥‥‥하던 다메섹 체험에서 왔고, 베드로는 불학무식한 사람, 비겁한 사람이었으나 그의 능력은 오순절 마가 요한의 다락방 체험에서 왔습니다. 모세는 고대 문명사회에 출 4:20 에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의 지팡이로 재앙도 내리게 하고 홍해를 육지 같이 반석에서 생수를 내게” 했습니다 엘리사는 여리고 협곡, 벧엘의 떡집, 요단의 죽음의 사선을 넘어가서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능력의 두루마기를 가지고 요단강물을 치면서 건너갔습니다. 요단강은 능력 의 두루마기 없이는 건널 때마다 빠져 다른 볼일을 볼 수가 없습니다. 대언자에게는 능력, 실력, 영력이 있어야 합니다. (3) 대언자와 사생활 하나님의 쓰시는 그릇은 지식 경력이 아닙니다. 깨끗한 그릇입니다. 1) 내 안에 거하라(요 15장) 2) 깨끗하게 했습니다(마 10:15). 대언자는 사생활이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마 10:16)했습니다. 대언자는 두 가지 향기가 납니다. 고후 2:15-16에 “사망에 이르는 향기”와 “생명에 이르게 하는 향기” 두 가지가 있습니다. 생화와 조화 사이에는 벌은 생화를 향해 찾아갑니다. 설교자의 인격에서 향기가 나와야하는데 그 향기는 사생활에서 저축함이 없이는 강단에서 향기를 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설교를 잘 하기 위하여 노력하기 전에 평소 사생활에서 잘 살기 위하여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향기는 어디에서 나오며 어떻게 저축하겠습니까 향기는 생명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만큼 향기도 나는 법입니다. 사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희생하면 교인들 앞에서도 인격의 감화, 설교의 감화 향기가 납니다. 설교할 때 천하에 제일 신령하고 자기만이 잘 믿는 것처럼 사자의 외침으로 대언해도 그 사생활에서 여러 가지 냄새가 나는 사람은 사망으로 인 도하는 향기임에 틀림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전 15:31에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 은 하나님의 사도로서 수련할 때 날마다 희생 날마다 자신의 명예, 자존심, 권위를 죽인다고 했습니다. 대언자는 사생활에서 정결하여 생명의 향기가 인격에서 나야합니다.

2. 골짜기가 진동하는 소리입니다 7절에 “내가 대언할 때 소리가 나고 진동하더니‥‥‥라고 했습니다. “소리가 나고 움직인다”는 원문은 “지진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여기의 지진은 느부갓네살의 바벨론 제국이 8년만에 붕괴되고 메대파사가 일어나 는 세계적인 대 변동과 동시에 이스라엘은 자유해방을 얻었습니다. 오순절 날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도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는 후에 120명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고”(행 2:2), 초 대 교회가 환란을 당할 때도 예수의 이름으로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 동하더니 무리가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행 4:31)고 말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도 큰 지진이 일어나고 하늘의 별 들이 태풍 앞에선 과실 같이 떨어지고 무덤이 갈라지고 자던 의인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3. 해골들이 움직이는 소리입니다 모든 운동이 정지되고 적막과 고요 속에 잠든 이 해골 골짜기에 대언자의 설교가 들려오고 이에 따라 그 골짜기에 하늘이 흔들리고 땅이 갈라지는 듯한 지진과 함께 소리가 나더니 이번에는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서로 연락하더니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가죽이 덮이더니” 인간의 육체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인간 편에서 생각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 목사의 설교 자체가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영적 방면으로 보면 설교 속에는 죄인의 심령을 향하여 말하는 하나님의 생명력이 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교회에서 대언자의 소리를 바로 들을 때 교회는 하나님의 응답으로 진동하고 심령들은 생명운동으로 약동할 것입니다.

4. 민족이 재건되는 소리 한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민족이 하나의 구심력을 찾아 그리로 모 든 작은 힘들을 한데 뭉치는 연결과 총화를 이루지 못할 때에 그것은 이미 마른 뼈의 무더기에 불과합니다. 힘이 생길리가 없습니다.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했는데, 그것이 그대로 우리의 얘기는 아니겠습니까 “이 뼈들은 한국 교회니라”의 경고의 소리가 아닐지 두렵습니다. 일찍이 힘 있었던 교회, 일찍이 민족정신의 주축이었던 교회, 일찍이 독 립 운동과 개화운동의 선봉에 서서 민족 양심의 골격이었던 교회, 이런 힘 있는 한국 교회가 이제 힘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생명이 없으면 마른 뼈에 지나지 못합니다. 제 구실을 상실한 그리고 사분오열하며 모두 총화를 잃고 제멋대로 산골짜기에 굴러다니는 뼈의 집합체, 그것이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제 주님의 음성을 들읍시다. “너는 이 뼈들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기독교는 기적의 종교입니다. 절망 속에서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일으키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다시 소생되어야 합니다. 생명 있는 크리스챤이 되어야 합니다. 마른 뼈대로는 아무것도 안 됩니다. 우리의 인생전체를 변화시킬 성령의 역사가 우리의 삶을 움직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오순절 얘기요, 예루살렘 복귀 얘기요, 오늘 우리의 얘기가 되어야겠습니다. 힘 있는 성도, 힘 있는 교회 그것만이 성도와 교회 존재 이유요, 바람직 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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