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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공의와 사랑 (왕상 03: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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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는 심리적으로 볼 때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랑은 심정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의는 비인격적이고 객관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사랑은 인격적이요, 주관적인 면이 있습니다. 공의가 일반적인 면서 전체적인 데가 있는데 비하여, 사랑은 개성적이며 특수성을 가졌다고 하겠습니다. 또 공의와 사랑은 언뜻 보기에는 정반대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의는 사랑을 나무라고, 사랑은 공의에 대항하는 것 같이 보여 집니다. 그래서 공의는 공의대로, 사랑은 사랑대로 제각기의 범주를 가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공의와 사랑은 서로 다른 방향을 가지고 있는 이질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알고 보면 공의와 사랑은 공존하는 것이요, 서로가 연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공의와 사랑은 영원히 연립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합치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어떤 일을 판단할 때 공의에 서야 합니다. 그러나 그 잘못을 공의에 입각해서 심판하는 것으로 일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교설은 공의를 내세우는 것이 첫 목적이 아니라 실은 공의에 근거하여서 그 이웃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남의 잘못에 대해서는 공의를 적용하고 공의로 심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에게 해당되는 문제일 경우에는 동정과 사랑을 구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에 있는 솔로몬의 이야기에서 그 보기를 찾읍시다. 해산한지 3일 차이 밖에 안 되는 두 여자가 자기 아기를 기르다가 한 여자가 아기를 밤에 눌러 죽이고 다른 여자가 자는 동안에 죽은 아기를 그의 품에 안기고 산 아기를 자기 아기라고 하면서 싸우다가 그 판결을 솔로몬에게 구한 이야기 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창기의 후예가 되지 않도록 (1) 한 여인이 밤중에 잠이 깨어보니 자기 곁에 잠들어 있던 아이가 자기에게 깔려 죽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여인이 이런 사고를 저지른 이유는 평소 잠버릇이 나쁘고 비대해진 자기 체구 때문일 수도 있겠고, 창기 출신인지라 밤늦도록 마신 술에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 몸을 가누지 못했기 때문일런지 모릅니다. 대개의 경우 여자가 어머니가 되면 잠결에도 아이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아이에 대하여 모든 신경이 쓰이게 되는 법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정 있는 보통 여자의 이상을 지닌 성품에 의한 것으로, 본문의 여인은 그런 위인이 못되는 것 같습니다. (2) 당황한 이 여인은 간계를 짜냈습니다. 그래서 자기 아이보다 사흘 전에 태어난 옆방 아이와 쥐도 새도 모르게 바꿔치기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미련한 짓이었습니다. 세상에 자기 아이를 몰라볼 어머니가 어디 있겠습니까 설령 상대방 여인을 속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남의 아이라도 자기 품에 품고 오면 그 아이가 자기의 분신, 자기의 소생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남의 아이라도 훔쳐다가 자기 아기처럼 꾸며 아이를 압사시킨 자신의 실책을 엄패시키겠다는 생각이거나 아니면 자기도 아이를 가진 어엿한 어미라는 것을 남편()에게 과시하고 싶은 생각에서였다고 하더라도 결코 지혜로운 일은 될 수 없습니다. (3) 두 여인 사이에 시배가 벌어진 것은 당연합니다. 세상에 자기 아이를 빼앗기고도 포기할 어머니가 없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분규 자체를 정죄하는 것은 삼가 해야 합니다. 마침내 솔로몬의 명재판에 의해 진부는 판명되었습니다. 산 아이를 반으로 갈라 두 여인이 반쪽씩 나눠 갖게 하라는 선고에 비명을 지른 여인이 진짜 어미이기 때문입니다

2. 공의와 사랑 이제 솔로몬 왕은 두 여인의 사연을 듣고 칼을 가져오라고 하시면서 산 아들을 둘로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가차 없는 솔로몬 왕의 공평한 판단을 봅니다. 만일 이 경우 공의라고 해서 그대로 집행되었다고 하면 그것은 공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설사 그것이 사물이라고 해도 판단하는 경우에는 인간이 문제가 되는데, 사람 자체이고 보니 그것이 공의일 수가 없었습니다. 솔로몬 왕 자신도 이 아들을 반반씩 갈라서 두 여자에게 주기 위해 재판석에 앉은 것이 아닙니다. 칼로 아들을 찌르려는 찰라 이상한 현상이 두 여자에게서 나타났습니다. 이 아들의 참 어미의 마음은 불붙는 사랑의 마음이 일어났고, 이 아들의 어미가 아닌 여자의 마음은 냉랭하게 내 것으로도 말고 네 것으로도 말며, 나누겠다는 것입니다. 만일 공의가 공의로 끝난다면 한 여인은 자기 아들인 까닭으로 땅을 치며 통곡했을 것이며, 한 여인은 법대로니 별 수 없다고 냉소하면서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솔로몬 왕은 공의의 검을 정확히 들었습니다. 공의는 허와 진을 구분하자는 것이요, 선과 악을 밝히자는 것입니다. 공의의 칼은 불붙는 어머니의 마음과 돌같이 냉랭한 창기의 마음으로 갈라놓고 말았습니다. 공의의 검 밑에서 솔로몬왕은 참 어미의 사랑의 마음과 거짓 어미의 질투의 마음을 밝혀 놓았습니다. 칼로써 아기를 벤 것이 아니라 두 어미의 마음을 베었습니다. 참 어미는 자기 아들을 죽이지 말아달라고 하면서 거짓 어미에게 양도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법은 어디까지나 공의 그것이어야 한다는 법치국가에서 종종 오판이 생기는 것은 그래서 입니다. 솔로몬 왕은 사람을 피상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내 아들의 생명만은 살려야겠다고 공의보다 사랑을, 죽음 보다는 삶을 택하는 참 어미의 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왕은 드디어 저 아기를 죽이지 말라고 하면서 “그 아기의 참 어미는 이 여자다”라고 하면서 아기를 참 어미에게 돌려주었습니다. 공의는 겉으로 보기에는 사랑과는 대립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한걸음 더나가서는 서로 상관없는 이질적인 영역인 것처럼 느껴집니다만, 자세히 보면 양립해 있는 것입니다. 아니 마지막에는 공의는 사랑에 삼켜져야 하는 것, 실로 사랑하는 마음이 곧 궁극적 의미의 공의입니다. 우리 크리스챤은 사랑, 사랑하면서 바른 공의가 무엇인가를 몰라서 사회생활에서 잘못될 때가 많습니다. 솔로몬 왕이 이 두 여인의 한 아들에 관한 판단을 대수로운 것으로 취급하였더면, 무슨 오판을 저질렀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왕은 한 어미, 그것도 신분상으로는 창기인데 그 문제 속에 자신이 관여해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소홀히 다루어도 좋을 일을 그 어미의 가슴 깊은 곳에 숨은 아들에게 향한 사랑의 마음을 척도로 하고 참 어미를 찾아내려고 애쓰는 젊은 왕의 깊은 심정에서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읽게 됩니다. 그래서 그 당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의 심리 하에 판단한 판결 속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있어서 그렇게 판결했다고 칭송한 것입니다. 사랑만이 궁극적인 공의입니다.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는 그 사랑이 모든 법을, 모든 진리를 온전하게 합니다. 우리는 참 공의이시요, 참 사랑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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