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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나를 만졌느냐? (막 05: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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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종종 뜻하지 않은 중에 놀라운 발견을 하고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사울이 아버지의 나귀를 찾으러 다니다가 뜻밖에 ‘네가 왕이 되리라’는 선지자의 예고를 들었습니다. 또 콜롬부스가 인도를 찾다가 뜻밖에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였습니다. 분문의 말씀은 또한 그런 감을 줍니다. 예수께서 회당장 야이로의 청을 받아 그 집에 가는 도중에 뜻밖에 초청을 받지 않은 어떤 부인 한 분이 와서 아무도 모르게 예수님 뒤에서 그 옷을 만져서 열두 해나 앓던 혈루증이 즉시 낫고 구원을 받았다는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물론 이 이적 자체가 아름답지만 여기 나오는 그 부인의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이 더욱 교훈적입니다. 이 여인은 열두 해 된 혈루병으로 지칠대로 지치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낫겠지 하는 기대도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돈이면 다 할 수 있다는 신념도 무너졌습니다. 유명한 의사면 고칠 수 있으리라는 소망도 헛것이 되고 말았고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고 재산은 탕진되고 몸과 마음도 다 상하고 말았습니다. 귀에 들리는 대로, 소문을 듣는 대로 할 수 있는 일은 다했습니다. 이제 모든 소망은 다 끊어진 것입니다. 이 여인은 죽음의 막다른 골목에서 주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는 최후의 소망을 걸고 군중 사이에 끼어 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입니다. 그의 마음에는 예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낫겠지 함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있지만 이 군중 가운데에는 이 부인과 같은 신자가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시간적으로, 물질적으로, 인간적으로, 모든 소망을 끊어버리고서 오직 그리스도만이 나의 주님이시오, 가정의주님이시오, 민족의 구주라고 예수님께 유일의 소망을 두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신자가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자신 이외에도 소망을 남겨둔 그런 사람보다는 이 세상의 모든 소망을 다 버리고서 마지막 최후의 소원을 예수님께만 걸고 있는 그가 누구냐 하고 찾으시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의 교훈 속에는 우리의 예수에 대한 관심이 얼마나 집중되느냐 하는 것을 묻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여인이 ‘뒤로 와서’ 만진 것은 예수님을 속이려는 생각에서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레 15:19-27에 보면 유대인들은 이 혈루증을 매우 부정한 병으로 취급함을 알 수 있습니다. 여인은 자신의 연약과 천한 신분을 깨닫고 겸손한 태도로 말 없는 가운데 간구하는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자마자 순간적으로 환자는 자기 몸에 기적이 나타났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혈루의 근원이 마르고 불치의 병은 완치되었습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는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모세도 사십 세의 젊은 나이에 자기의 실력과 무술의 완력을 믿고 자신이 이스라엘 민족의 영도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을 믿은 결과 애굽의 감독관을 죽이는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모든 인생은 살인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망명객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팔십 세에 하나님 앞에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사십년간의 그의 미디안 광야 목양의 생활은 절망뿐이었습니다. 나이도 이제 많아 몸은 늙고 다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모세의 대답은 무엇입니까 “주여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소서. 나는 입술이 둔한 사람입니다.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진정 몇 번이고 사양했습니다. 하나님은 기어코 그를 택하시고 세워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만든 것입니다. 자기의 왕자의 권위와 지식을 가지고 하겠다고 할 때는 안 들어 주시고 오히려 스스로 못하겠다고 사퇴할 때 비로소 받아들이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세상 소망이 다 끊어진 자에게 하나님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그의 최후의 소망 한 가닥을 하나님께 두는 자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음성 ‘누가 나를 만졌느냐’는 것은 오늘 수많은 교인 가운데 누가 이렇게 철저하게 자기의 소망을 예수님께만 걸고 나오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세상에 한쪽 다리만 주님께 거는 자를 주님은 돌보지 않을 것입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는 말씀은 믿음으로 사는 자는 완전케 하여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믿음 외에 다른 것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욕심, 감정, 미움 등입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우리 주님은 우리 마음속에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우리에게 신자라는 이름을 붙여 주십니다. 신자라지만 신자로서의 소망 아닌 요소를 더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 속에 들어가고 시험을 만나고 고생을 겪고 환란을 당하게 되면 모든 잡탕들은 다 녹아져버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순수한 믿음만이 남게 됩니다. 이 여인은 세상 모든 소망을 다 버리고 순수한 믿음만이 남아 예수님께 향해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이런 병든 자기 자신을 은밀히 드려서 겸손한 자세로 그를 만나 뵙길 원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빈손입니다. 아무런 자랑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아무도 그리스도 앞에 나아갈 아무런 조건도 없습니다. 그저 빈 손 들고 나아와서 무조건 예수님의 옷단을 만져야만 할 것입니다. 주님은 옷에 손대는 자를 찾으십니다. 주님의 질문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에 대해 제자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의 소망은 다 끊어버리고 오로지 그리스도에게만 모든 것을 의탁하고 그에게서 구원을 바라는 심정으로 나아오는 자를 주님은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같은 성경 찬송을 들고 예배당에 왔다가 돌아가는 신자들 중에도 진정으로 주님의 마음의 옷깃에 접촉하고 신앙을 고백하고 돌아가는 자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공연히 예수님과 부딪쳤습니다. 그들은 예수께 공연히 왔다 공연히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이 부인은 주님께 한 번 온 후에 주님과 더불어 한 몸이 되어서 갔습니다.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세계 문학사에 최초의 시인이라고 할 수 있는 호머의 작품 중에 영웅 유리시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개선하여 오는 길에 바다에서 표류하며 갖은 고생을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요정들이 사는 섬 부근을 통과했습니다. 그 곳은 요정들의 노래를 들으면 선원들이 노젓기를 잊고 배는 암초에 부딪쳐 깨져 침목하거나 노래 소리에 몸이 달아서 자기도 모르게 바다에 뛰어 들어가 물에 빠져 죽는다는 전설이 있는 곳입니다. 유리시스는 이 위험을 방지하기 위하여 선원들의 귀를 초로 매웠습니다. 자기는 유흥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으나 만일을 위해 자기 몸을 마스트에 비끌어 매었습니다. 드디어 그 요정의 노래가 들려 왔습니다. 귀가 막힌 선원들은 그대로 노를 저었지만 유리시즈는 몸이 달아올라 바다에 뛰어 들어갈 충동에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나 몸이 비끌어 매어 있었기 때문에 바다에 들어가지를 못하고 무사히 그 섬을 통과해 갔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세상에 살 때에 우리 주위는 확실히 이기기 어려운 유혹으로 싸여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빼앗는 갖은 죄악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모릅니다. 내 몸이 완전히 예수와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의 모든 유혹을 이기게 되며 모든 괴로움을 건너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공연히 주님 앞에 구경삼아 온 것이 아닙니다. 공연히 예수의 몸을 만질 것이 아닙니다. 공연히 주님 곁으로 빨리 나아갈 것만은 아닙니다. 누가 나를 만졌느냐 이 예수의 거룩한 물음에 “주여! 내가 주님을 만졌나이다 내 병이 나았나이다”라고 이 부인처럼 겸손히 나와서 고백할 수 있는 신자가 되기 바랍니다. 우리 심령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하신 은혜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결합의 자리에 이르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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