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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보좌의 이상 (겔 0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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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이 본 환상은 포로생활 가운데서 본 것으로 필경 히브리 신앙생활에 전환점을 이룬 결정 적 인 환상이었습니다. 에스겔은 밑바닥 인생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는 바벨론 포로로 5년간 묶여 살았습니다. 타의에 의해 망국 난민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의 나이 30세 제사장으로 임직할 적령기였습니다. 그러나 성소가 없었습니다. 그의 조국 유대는 지도력을 박탈당한 채 침략과 망국의 끊임없는 공포 속에서 가까스로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옛 신앙의 불꽃은 꺼져 버렸고 주님에 대한 충성은 냉담해졌으며 갈수록 종교는 혼탁해지고 일상생활과는 거의 무관하게 관습적으로 전락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속에 하나님이 직접 개입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느꼈던 포로인 유대백성에게 일신된 비젼과 분명한 메시지를 안겨 주었습니다. 여호와의 선지자 에스겔의 소명은 하늘을 횡단해 가는 여호와의 불수레를 보는 환상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환상의 구조는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계곡에서 일어나는 뇌성벽력과 폭풍우를 시사하고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검은 구름이 오고 그 속에서 번개불이 번쩍거리고 폭풍우가 내리치고 그리고 나서 무지개가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됩니다.

1. 영광의 복음 에스겔서 오래전 일입니다. 영국 해군이 도적놈들 때문에 매우 괴로움을 받은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도적들이 해군에게는 매우 귀중한 뱃줄을 훔쳐다가 전당포에 팔아 먹곤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해군에서는 죄를 내어 해군에서 사용하는 뱃줄을 만들 때는 언제나 한가닥의 진홍색 실을 넣고 짜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어디서든지 해군에서 잃어버린 듯한 뱃줄이 발견되면 칼로 그 뱃줄을 잘라보아서 만일 그 속에 진홍색 실가닥이 들어 있으면 해군의 뱃줄이라는 것을 알아낼 수 있도록 하였다 합니다. 에스겔서는 비유하면 이 진홍색 실가닥을 넣고 잔 뱃줄과 같은 것입니다. 에스겔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의 사상이 꿰뚫고 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되고 그 영광이 떠나 있다가는 다시 되돌아오고 이 영광은 인간을 변화시키고 또한 우리가 소망할 바 최후의 목표로서 나타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생활 말기에는 세기나(Shekinah)라는 말을 많이 쓰게 되었습니다. 글자 자체의 뜻은 “사시는 하나님”이나, 실제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는 말로 되었는데 여기의 존재라는 말은 특히 에스겔 1장과 이사야 6장 또한 그밖의 다른 성경에 나타난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광휘를 표시합니다. 에스겔서는 20세기 동안 영광의 가장 으뜸되는 복음이며 이 영광은 여기저기로 움질일 수 있고 멀리 떠나기도 하며 또는 다시 돌아오기도 하는 분명 한 실재로서 표현되어 있습니다.

2. 에스겔서의 구성 (1) 예언의 역사적 배경 및 예언의 장소와 시기 에스겔이 예언한 시대는 주전 614년 앗수르 왕이 사로잡히고 앗시리아 제국이 망하던 때, 또 612년 니느웨성이 함락되던 때이었습니다. 최후의 치명적 타결을 받은 것이 갈대아 사람 나보폴라살의 아들 느부갓네살이 앗시리아의 세력을 꺾고 애굽에 관심을 기울였을 때 칼 케미슈에서 된 일이었습니다. 반란과 싸움이 가장 치열했던 때가 바로 주전 625년경 앗시리아 왕국의 최후의 왕 앗수르 바니팔이 죽고 나보폴라살이 득세했을 때입니다. 그 해에 나보폴라살은 자칭 바벨론 왕이라고 선포했지만 앗시리아 사람들은 그의 선포를 부인할만한 능력이 없었습니다. 또 주전 609년경 바로 느고의 액운이 그들을 쳤을 뿐만 아니라 후에 칼그미스에서는 갈대아 풍조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대 세계에 있어서 오랜 군왕정치의 표지이었던 앗시리아는 패망하고 그 자리를 차지한 자는 새로운 바벨론 제국(BC 625-539)을 세우겠다고 나선 갈대아 사람 느부갓네살이었습니다. 아몬 왕이 잠깐 통치한 후에 타이 어린 요시야 왕이 위에 올랐습니다(BC 640-639). 그는 분명히 예언자적인 업적을 남긴 왕이였습니다. 요시야 왕이 죽은 후 유대의 왕위는 급속도로 변천합니다. 백성들이 여호아하스를 기름부어 통치자로 택했지만 석달을 치리하자마자, 애굽인들은 여호야긴을 왕위에 올리고(BC 609-598) 여호아하스를 감금해 버렸습니다. 칼케미슈 전쟁이 끝나고 애굽인들이 제나라로 급히 철수하게 되자 유대왕은 자기의 상전인 느부갓네살왕과 갈대아 사람들에게 조공을 바치며 과히 난관없이 지냈습니다(BC 605). 그러자 3년 후 그들을 배반하니 갈대아인들이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공격해 와서 여호야김은 여기서 죽습니다. 액운에 찬 그의 아들 여호야긴은 석달 통치한 후 또 예루살렘 성을 갈대아인들에게 포기해 버리고 지배자의 나라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포로들 틈에 에스겔이 끼여 있었고 그래서 메소포타미아 산골짜기까지 800마일이나 끌려가 그발강 가 델아빕에서 살았습니다. 포로생활 중 에스겔은 하나님의 환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집을 잃고 나라를 약탈당하고 성전의 더럽힘을 당한 꼴을 본 후 포로신세가 되어 쫓겨난 이 백성들은 도대체 여호와가 살아 있나 죽어버렸나 하고 의심했을 것입니다. 이 환상은 택함을 입은 백성에게 역사적이고도 정신적인 전망을 주었습니다. 여호와는 아직도 살아계셔서 언제 어디서나간에 원하시는 대로 가고 오실 수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피조물의 세계들, 즉 인간들의 일이든 역사를 넘어선 일이든 간에 다 주관하고 계셨습니다. 에스겔의 하나님은 모든 생명과 역사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에스겔은 포로 초기에 예언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포로 후기에 예언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환난의 시초, 즉 그들이 아직 무심하고 겸비치 않을 때 하나님이 선지자를 일으키사 그들을 각성시키고자 하시고 환란의 말기에 즉 그들이 낙심하고 비관할 때 그들을 위로하고자 하신 것은, 그들에게 내린 하나님의 선한 의지와 은혜로우신 계획을 나타냈습니다. 에스겔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은 절망중에 이스라엘의 회복을 바라보게 하는 희망을 주는 창조적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2) 에스겔서의 메시지 에스겔이 여기에서 말하는 예언 속에는 신비스럽고 모호하고 이해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것들이 많이 있기에 유대 랍비들은 이스라엘 젊은 사랑들에게 30세 되기까지는 이 에스겔서를 읽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예언의 이런 난해성 때문에 그들이 성서에 대해 편견을 품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는 특히 새로운 신학적 대 주제를 만들어 낸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구약성서의 깊은 교리를 증강시키고 또 뚜렷하게 해줍니다. 1) 하나님은 생명에 이르는 열쇠가 됩니다. 여호와가 생명에 이르는 열쇠라고 하는 사실은 다음의 네 귀절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목자의 비유(34:11-31), 마른 뼈의 환상(37:1-14), 성전으로부터 흐르는 강의 은유(47:1-12), 회복된 도성의 이름(48:35) 등입니다. 사람의 생명 속에 하나님의 살아계심만이 그들의 유일한 희망의 근거였고 재생의 비결이었습니다. 2) 계시가 나타나는 영역은 역사라는 것입니다. 전능자의 행위가 근본적으로 자연 가운데 나타난 계시로서 설명되어지지만 결국 이것은 여호와가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인류에게 나타나게 하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와인 것을 증명해 보이는 것 가운데 가장 놀라운 것은 해골 골짜기에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난다고 한 것입니다. 3) 여호와는 만국의 하나님이십니다. 4) 개인의 책임과 집단 범죄로 구분했습니다. 겔 18:20에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고 했습니다. 그는 조상의 죄가 자손에게 미치는 것도 아니며 또 자손의 죄가 조상에게 미치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다 자기 책임하에 있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예언자는 집단 범죄의 문제를 설정시키지는 못했으나 인간은 언제나 책임적인 존재라고 하는 사실만은 분명히 설정시켜 놓았습니다. 5) 재건된 사회상 에스겔이 본 재건되는 나라는 유대나라에 국한된 좁은 세계가 아니라 전체 이스라엘 즉 12지파가 이어받은 전 팔레스틴에 걸친 땅을 재생시킨다는 것입니다. 이 나라의 한복판에는 성전이 건축되고 참된 왕이 지배하며 성전은 례위 지파만이 봉사하고 사후의 후손들만이 사재가 된다고 했습니다. 6) 여호와의 자비와 선하심 하나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완고한 낡은 마음과 반항의 정신을 씻어버리도록 인간에게 새 마음과 새 정신을 부여하심으로써 인간의 본성 그 자체를 온전히 속량해 주신다는 약속을 해 주었습니다. 에스겔서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상은 여호와의 계약은 결코 내던져 버릴 수 없는 영원무궁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같은 빛에 비추어 보아서 그들을 포로 신세가 되게 한 것은 어디까지나 여호와의 법도를 성취시키기 위한 하나의 정화 과정이라고 해석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영광의 보좌(26-28절) 큰 남보석 용상에 앉은 여호와의 모습은 무지개의 표현과 상관되는 것으로 후에 유대교 및 그리스도교 기록 가운데서 거룩한 환상을 모델로 한 때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생물위 수정 같은 궁창을 말하며 그 궁창 위에 보좌가 있습니다. 남보석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그 보좌 위에 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의 상반은 단쇠같아서 그 주위며 속이 불 같고, 하반도 불 같아서 사면으로 빛이 납니다. 그 빛을 묘사하여 비온 후의 무지개에 비합니다. 이 양상을 여호와의 영광의 표현으로 지칭합니다. 에스겔의 이상 중 절정을 이루는 이상이라 할 것입니다. 위의 이상이 보인대로 이런 지경에 산사람은 수정 같은 궁창하에서 보좌의 약속을 누리는 것이 절정의 삶입니다. (1) 에스겔 선지자가 본 그리스도의 이런 영광은 생물들의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있었습니다(26절). (2) 선지자가 본 첫번째 것은 보좌였습니다. 왜냐하면 신적 계시는 재앙적 권위로서 후원되고 유지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보좌 위에 있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대해 신앙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3) 에스겔은 보좌 위에 있는 사람의 형상을 보았습니다. 비록 궁창 위에 있는 보좌이나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은 자로 가득차 있습니다. 다니엘은 환상 중에서 왕국과 주권이 “인자와 같은” 자에게 주어지는 것을 보았으며, “그의 인자됨을 인하여 심판을 수행할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4) 에스겔은 그 인자를 보좌 위에 있는 왕과 심판자로서 보았습니다. 그는 비록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는 했지만 인간의 영광 이상으로 나타났습니다(27절). 1) 하나님은 번쩍이는 빛으로 나타나셨으며, 2)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심판의 불로 나타나셨습니다. (5) 하나님의 보좌는 무지개로 둘러 있었습니다(28절) 에스겔은 이 환상을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이것은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었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압도되어 엎드렸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런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에스겔은 그 자신의 무가치한 명예에 대한 미천한 감정 가운데서 엎드렸으며 그와 하나님 사이에 있는 무한한 거리를 깨달았습니다. 에스겔은 그의 마음이 가득 채워져 있었으며 사로잡혀 있는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두려움과 존경심의 증거로써 엎드렸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장엄한 영광 앞에 설 때 영광의 하나님의 실체를 체험했을 때 그 앞에 엎드려 머리를 숙이게 됩니다. 새 소망은 그 때 비로소 탄생됩니다. 우리 세대처럼 이러한 경험이 절실히 요망되는 때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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