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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엘리후의 연설내용 (욥 3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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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서론적 진술을 통하여 엘리후는 아직 거기 같이 있는 친구들에게 그리고 세 친구 외에 다른 중인들에게, 그리고 욥에게 그가 토론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밝히고 정당화 합니다. 엘리후가 보기로는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은 오히려 욥에게 패배당했습니다. 엘리후는 처음에는 그들 세 사람의 나이를 존경하여 아마 자기보다 더 위대한 진리를 말하려니 기대했으나 이제 보니 지혜란 결코 노인의 유물이 아니라는 확증을 얻었다고 합니다. 오히려 그는 지혜란 사람 안에 있는 전능자의 심령과 기운이 가져오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엘리후의 이런 입장은 전적으로 지혜문학의 기본 입장입니다. 즉 오직 하나님에게만 속한 참 지혜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람에게 나누어 주심으로써만 사람이 지혜를 가질 수 있다고 하는 입장입니다.

1. 하나님의 사자 엘리후(1-5절) 욥과 그의 친구들 사이에 했던 모든 말을 들었던 엘리후는 나이 든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영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세상의 지혜있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비밀을 감추시고 순전한 사람들에게는 그 비밀을 들어 내신다는 것을 우리는 성서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약하고 멸시받는 자들을 선택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앞에서는 어떤 인간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욥이 자기를 의롭다 함에 대한 엘리후의 노여웠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성경에는 의인이 있다고 합니다. 창 6:9에 노아는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눅 1:6에 엘리사벳과 사가랴를 의인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모순입니까 아닙니다. 저들의 의는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 편에서 의인입니다. 욥은 자기가 도덕적으로는 죄인이라고 이미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신앙적으로 의인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의인입니다. 세 친구가 공격하는 것과 같은 그런 죄인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 친구의 비난은 어불성설입니다.

2. 엘리후의 성품(6-14절) 엘리후가 그의 연장자들 사이에서 듣고 있다가 괴로운 논쟁에 가담하려는 엘리후의 겸손과 재치를 보게 되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엘리후는 연장자들이 욥의 불만에 대해 전혀 대답을 해 주지 못하고 욥에게 그러한 시련 가운데 두시는 하나님의 목적을 설명하지 못하고 그들은 단지 욥을 무자비하게 비난만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엘리후는 욥이 젊은 사람으로서 매우 미묘한 입장에 처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후는 말할 적당한 기회를 찾고 있다가 욥의 말이 끝나고 세 친구들의 대답이 없는 순간을 포착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속하는 손길이 엘리후에게 닿게 되자 엘리후는 그의 입술을 엽니다. 현대 사람은 노인을 업신여깁니다. 현대는 청년들과 세대 교체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노인을 존중히 여겼습니다. 7절에 보면 세상살이에는 노인이 낫습니다. 그러나 8-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는 나이가 많다고 아는 것이 많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신령한 지혜는 하나님께로만 나오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직관적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통해 역사하십시다. 창 41:8에 보면 바로 왕을 감동시켜 요셉을 기용하게 하신 분이 성령이십니다. 사 11:2에 성령을 가르쳐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라고 했습니다. 엘리후는 성령의 감동을 받은 자로 인간적인 면모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1) 그는 아주 젊잖고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는 젊었으나 재능이 있는 사람이요, 그러면서도 건방지거나 주제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 자신과 그 자신의 판단에 대해 매우 겸손한 생각을 품었습니다. 그는 자기 선배들에게 심심한 경의를 표하였으며 그들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엘리후의 젊잖음은 자기 연장자들이 한 말에 기울인 그의 인내심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무의미한 그들의 말에도 그는 참고 경청했습니다. 저들이 설사 이 변론을 농지거리로 하였거나 아무 것도 아닌 양 말하였다고 하더라도 또 욥을 납득시키기에 온당한 말은 하지 못하였다고 하더라도 그는 저들이 종내에는 확신을 주는 어떤 결론에 이르도록 할 것이라고 바라면서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었습니다. (2) 엘리후는 명쾌한 분별력과 큰 용기를 가진 사람이며 침묵의 시기와 방법을 잘 알 뿐만 아니라 말할 때와 말하는 방법까지도 잘 아는 자였습니다.

3. 엘리후의 연설의 요지(15-22절) 엘리후는 잠간 말을 멈추고 나서 잠시 후 반응이 없자 “그들이 놀라서…… 할 말이 없음이로구나”라고 외칩니다. 16절에 “그들이 말이 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달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라고 그는 외칩니다. 아니 그 냉냉한 침묵이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불충실하도록 해서는 안되겠고 엘리후는 그에게 주어진 빛을 억제하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 중에서 그의 “임무”를 이행해야만 했습니다(17절). 연장자들은 말할 것을 찾아 내어야만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무척 애를 써서 어떤 것을 찾아냈을 때 그것은 힘이 없고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인 엘리후는 할 말이 가득했습니다. 안에 있는 속 심령은 그를 강하게 하여 그의 마음에 메시지를 부어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을 하여야만 시원할 것입니다(18-20절). 엘리후는 그가 공손하게 말하기를 바랐지만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해도 그들의 용서를 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후는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의 낯을 보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엘리후는 아첨하는 법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가 그의 청중의 존엄이 그의 성실함을 방해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면 그를 지으신 이가 속히 그를 옆으로 해치우실 것입니다(22절). 엘리후의 마음에는 진리가 가득 찼다고 합니다. 따라서 말하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렘 20:9에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엘리후는 말할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는 할 말을 할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절에 “내 안에 있는 심령이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가를 내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내가 그것을 얘기하도록 압박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내게 만약 분출구가 없다면 그것이 작용하는 날리는 새 가죽 부대가 터짐같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20절에 자기 의사를 발표하는 일은 엘리후에게 있어서 안심이 되고 만족스런 일이 될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번영을 누리며 명성을 떨치는 자들이라 경의를 표하고자 하지는 않았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슈리후가 자기들의 말대로 얘기해 주리라고 기대할 수 없었고, 또 그가 자기들의 말이 정당한 줄로 확신하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품을 수 없게 하였으며, 그늘의 권위를 위하여 그가 자기들의 지시에 호응하리라고 생각하게도 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엘리후가 비록 청년으로서 장래의 출세를 생각했었지만 그는 권세있는 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진리를 외면하려고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가 취한 결단은 훌륭하였습니다. “나는 사람들에게 아첨하는 말을 할 줄 모르며 또 아첨하는 말을 사용하지도 않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젊고 강직한 기상을 소유하시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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