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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길 (창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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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의 믿음은 갈대아 우르를 떠날 만큼 확실했습니다. 오랫동안의 동안의 인습과 조상 전래의 기업을 버릴 만큼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철저하였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이 서야 할 땅을 향해 애굽을 떠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적절한 약속을 주셨던 것입니다. 약속의 땅은 그들의 꿈일 뿐 확실한 현실처럼 손으로 만져보고 수로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한 믿음이 보장되는 벅찬 소망의 세계는 천국 영광이지만 이를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신령한 신비의 세계는 믿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히 6:2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신앙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1. 성경이 밝혀준 자아의 모습

갈대아 우르는 현 세상의 상징입니다. 재산과 부모와 일가 친척과 친구를 뗄 수 없고, 버릴 수 없는 각가지 인연들이 떠나는 것을 주저하도록 가로막는 장애물이었습니다. 먹고 입고 잠자기에 넉넉한 호조건들이 손짓하며 롯의 처를 뒤돌아 보도록 한 강력한 유혹이었습니다. 사랑을 속삭이고 정담을 나눌 수 있고, 단락한 인간 생활을 보장할듯, 먹음직하고 보람직한 향락의 물결이 우리로 하여금 멈추어 서게 합니다. 현실에 안주하도록 하는 것이 신앙의 길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는 최대의 유혹이요 인간의 한계인 것입니다.

2. 떠나가라 하신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가장 큰 명령 중의 하나는 “떠나가라‥‥‥”는 것입니다(창 12:1).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갈대아라는 뜻은 파괴 또는 멸망이라는 뜻이요, 우르라는 뜻은 화염 혹은 불꽃이라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은 파괴와 불로 가득한 곳에서 살아왔던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셨고, 그 곳을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때 아브라함은 순종과 믿음으로 고향을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게 될 때 영안이 열려 갈대아 우르가 어떤 곳인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곳은 육안이 멀리 보이는 신기루 같은 속임수요, 영원성이 없는 속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곳은 우상이 난무하는 죄악의 도성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현 세상의 엄부렁한 물질 문명의 밑창에 도사린 마귀의 음모를 발견한다는 것이 현명한 일이며 촌음을 지체치 말고 떠나야 함이 사는 길일 것 입니다. 애굽의 고기 가마도, 넉넉한 물도, 금수 아닌 사람에게 할 수 없는 것이기에 체신과 곤욕과 치욕스런 종의 멍에를 피하려는 자연스런 민족운동이 하나님의 뜻으로 깃발을 들게 된 것도, 잘 먹고, 잘 입는 것만이 인간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첫째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내 마음 속에 모셔들이는 일입니다. 둘째는 이 세상의 혈육 및 정욕을 반드시 떠나는 일입니다. 땅의 생활과 하늘의 생활은 확실히 다릅니다. 세상 생활과 신령한 생활을 혼잡하게 섞으면 안됩니다. 구별된 생활을 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는 신령한 하늘의 은혜와 축복의 은혜를 공급하여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의 완성과 신령한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떠나가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속히 파괴와 불타는 갈대아 우르와 같은 죄악의 도시를 떠나 축복의 가나안으로 갑시다. 버릴 것은 버리고, 끊을 것은 끊고, 묻어버릴 것은 묻어버리고 갑시다.

3.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영적인 자아발견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동기를 마련합니다. 오직 갈 곳은 아버지 품이라고 깨달은 탕자의 마음에 찾아 들었던 겸비가 회개를 가능하게 만듭니다. 회개의 참 뜻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겸비는 하나님에게로 예속을 자초하지만 자학은 아닙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생사를 초월한 참 사랑의 열정이 불붙을 때 느껴지는 행복감에 사람은 사로잡히게 됩니다. 고후 5:14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라고 하신 말씀대로 자갈 먹인 말처럼 본래의 야수성을 억제당하고 손수히 주인된 하나님을 이롭게 합니다. 하나님을 이롭게 함은 곧 자기를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모범적 신앙은 “예”가 특징이요, 베드로의 특징은 주님 음성을 듣고 그물을 버려둔 채 “예”하고 따른 데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완전무결한 신성과 인격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긍정인 것입니다.

4. 새로운 생애의 출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길을 떠났습니다. 시작하는 사람이 위대하다라고 말한 이가 있습니다. 시작이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뜻일 것입니다. 무슨 일을 시작하려면 적어도 세 가지 요건이 구비되 어야 합니다. 첫째는 꿈과 이상이 있어야 하며, 둘째는 창의적인 지혜가 있어야 하며, 세째는 결단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시작하는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은 이상 세 가지 요건이 구비되어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시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이 하지 뜻하는 일, 또 하지 않을 일을 말입니다. 그에게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젼과 거기에 수반되는 창조적인 지혜와 또 분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가는 용단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시작하는 사람은 모험을 해야 합니다. 남의 업적의 그늘 뒤에서 힘들이지 않고 살아가려는 안일주의자나 자신이 원하는 일이기는 하면서도 좀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타산주의자나 회의주의자는 실수는 저지르지 않을지 모르지만 창조도 없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살던 사람이지만 하나님께 발탁되어 가나안으로 건너가 이스라엘을 시작한 것입니다. 단순히 한 민족과 국가를 창업했다는 정치적인 차원에서 보다도 혼합 종교의 지배 아래 있던 열방 중에서 유일신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는 선민의 나라를 개국했다는 종교적인 차원에서 크게 기림을 받을만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입니다. 할례는 성별과 헌신의 표시이며, 십일조는 정치가의 신앙고백으로 이 역시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인데, 이를 시작한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과연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시작하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나 시작을 한다고 해서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위대한 일을 시작하는 사람만이 위대한 것입니다. 시작을 하되 아브라함처럼 수직적으로 종교성이 있고, 공간적으로 공익성이 있고, 그래서 시간적으로 영원한 가치가 있는 일을 시작해야만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 민족이나 인종에 차별없이 진리가 되며 그 말씀대로 따르고 믿으며 행하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확 트였습니다. 천한 자나 귀한 자나 누구나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참는 자가 아니면 갈 수 없는 좁은 길입니다. 아무나 가는 길이 아닙니다. 다만 믿음으로만 깨달을 수 있고, 믿음으로만 찾을 수 있고, 믿음으로만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을 이이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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