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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의 마음 (빌 0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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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받은 결과를 병을 고치거나 예언하는 등 기사이적을 행하는 것이라고 먼저 생각하기 쉬우나 그보다도 성령을 받으면 내 마음이 변화하여 예수의 겸손의 마음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사람의 마음이 예수의 마음으로 변화되는 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속담에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속의 사람 마음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또한 옛글에 “범의 가죽은 그리되 뼈대는 그릴 수 없고 사람의 얼굴은 알되 그 마음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들은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대저 마음이란 그 사람의 생활을 좌우하고 행동과 진로를 좌우하고 또 인생 실패를 좌우할 딸만 아니라 그 사람의 일생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입니다. 마치 창파에 뜬 배가 피안의 목적지를 향해 갈 때 사공이 나침반에 의해 바로 가듯이 고해 같은 세상에 갈대 같은 인생의 항해 길에 나침반은 곧 그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 여하에 따라 그 사람의 행선은 좌우됩니다. 마음이 악하면 행실도 악하고 마음이 착하면 생활도 착하며 마음이 바르면 몸도 바르고 마음이 게으르면 행동도 게으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이 성경에서 배우고자 합니다.

1. 깨끗한 마음 예수의 마음은 의롭고 거룩하고 깨끗합니다. 백옥에는 혹 티가 있으려니와 예수의 마음에는 일점의 티도 없고 일월에는 혹 구름으로 가리우는 때가 있으려니와 예수의 마음에는 한 털 가락의 어두움도 없습니다. 예수의 마음은 이렇듯 성결하고 광명한데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사람의 마음을 거울에 비추어 볼 수 있다면 그 검은 마음은 흑인의 얼굴보다 더 검을 것이요 음욕에 더러워진 그 마음은 표범의 가죽보다, 뱀 가죽보다 더 흉할 것입니다. 흑인의 피부같이 검은 우리의 마음을 내버리고 눈보다 흰 예수의 마음으로 바꾸며 뱀 가죽, 표범같이 흥한 마음을 변하여 양털보다 흰 예수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 그 얼마나 좋은 일이겠습니까 깨끗하지 못한 우리의 마음은 마치 창 1:2에 빛이 오기 전에 땅과 같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캄캄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이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 받아 깨끗한 마음이 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조화의 목적인 것입니다.

2.온유와 겸손의 마음 사도 바울은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 하였으며 또 예수께서는 일찍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를 배우라”고 말씀하셨고 또 친히 그렇게 그의 일생을 온유와 겸손으로 지내신 것입니다. 잠 16:18에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겸손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대왕도 교만하다가 발광하였고 페르시아의 하만 장군도 오만하다가 패가망신하였으니 교만이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벧전 5:5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그 근본이 하나님의 본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곧 하나님을 본 자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이시나 그 동등권을 버리시고자 했습니다. 흔히 우리는 자아적 고집이 있어 나의 체면 권왼가 손실될까봐 귀중품을 저축하듯이 자기의 권위의 보존에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비우고 종의 형체를 입으셨습니다.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봉사하는 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온 것은 봉사함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섬기려 하고 생명을 버려 속죄하여 주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이면서 완전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에 왔지만 그 생활이 서양인으로서 봉사하면 혐오감만 조성할 뿐 효과가 없습니다. 이제 어떤 선교사가 한복을 입고 한국 음식을 먹곤 한민족과 거처를 같이하며 빈민굴 속에 함께 살며 열성으로 전도한다면 이 선교사야말로 한국에 적합한 선교사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이 되셔서 인간의 사정을 잘 아시므로인간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인류를 구속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죽음은 보통의 죽음이 아니라 노예나 받는 저주의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죽음입니다. 주님의 고민의 절정은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입니다. 자기 뜻대로 할까 하나님의 뜻대로 할까 하는 결단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거의 부정하고 영원의 하나님께 순종하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3. 사랑하는 마음 사랑은 기독교의 본질이요 특색이요 최고의 계명입니다. 기독교에 사랑이 빠지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고전 13:2에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한 것은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은혜 중에 가장 고귀한 큰 은혜요 (고전 12:31), 사랑은 죽음보다 강한 것입니다 (막 8:67). 그리고 사랑은 영원히 폐하지 않는 것입니다 (고전13:8). 평양 신학교에서 예배 시간에 자주 참석하시던 순교자 최봉석 목사가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같이 못한 죄를 용서하소서”라고 떨리는 음성으로 늘 기도했다는 이야기는 사랑에 대해 다시금 우리의 열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5,000명을 먹이신 후에 “내가 곧 생명의 떡 이라”고 말씀하시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겼다”고 가르친 이야기가 그림같이 펼쳐집니다. 해진 벳새다 광야에 주린 자는 5,000명이요 떡은 5개뿐입니다. 이 떡 5개를 누가 먹어야 옳으냐 하는 것은 인류역사 오늘에 이르기까지 큰 문제입니다. 5천명은 굶어 죽든지 말든지 나만 먹겠다는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떡 5개라면 두 개는 부부가 먹고, 한 개는 아들에게, 한개는 딸에게, 나머지 한 개는 내일 양식으로 저축하여 두고 주린 5천명을 버리는 것이 인류의 경제사상 입니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이 손에 가진 떡을 빼앗는 것이 인류의 생존경쟁입니다. 예전에 어떤 훈장이 아이 손에 가진 떡을 달 모양으로 만들어 준다고 하며 달 모양만 남기고 베어 먹고 그 다음에는 별을 만들어 준다고 하며 돌려 베어 먹고 나중에는 꿀떡을 만들어 준다고 하고선 그 떡을 꿀떡 삼키고 말았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마음은 5천 대중 앞에서는 자비의 마음이요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주님의 대자대비의 마음은 벳새다 뜰에 꽉 차고도 남음이 있으며 우주에 차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손으로 나누어 주는 오병이어는 5천 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 두 광주리에 채울 수 있을 만큼 남았습니다. 이는 사랑의 이적이요 사랑의 잔치입니다. 한 알의 땅에 떨어지는 수수나 조 알이 수 만.십만 배로 결실이 맺혀지는 것도 하나님의 뜰에 행하는 사랑의 이적입니다. 예수의 눈에는 해지는 광야에 주린 사람보다 말세의 거친 세상에 영적 기갈자를 더욱 불쌍하게 생각하셨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보리떡으로나 물고기로 살수있지만 영적 기갈자는 무엇으로 살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내 살을 먹으라하신 예수의 희생, 예수의 사랑으로만 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 여러분도 예수의 마음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희생으로 실천하여 신자의 영화를 다 누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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