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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눅 08:4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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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괴로움은 아마도 고독일 것입니다. 고독 중에서도 버림받은 자의 고독은 더욱 더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 참을 수 없는 버려진 자의 고독 속에서 나를 알아주는 그 누구를 만난다면 그 사람이 바로 나의 구주가 될 것입니다. 하이덱거는 말하기를 사람은 던져진 존재라 했습니다. 고독 그 자체가 실존이기 때문에 이 실존에서 벗어나려고 반항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고독 속에서 순응하며 사는 것이 그 고독을 해결하는 길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성을 가지고 사회적 관계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웃관계와 가정관계가 깨어짐으로 인간은 큰 고통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인구는 45억이 넘어가지만 그와 반대로 이웃관계는 점점 멀어지고, 심지어는 가정관계마저도 희미해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서 더욱 고독합니다. 이 작은 마음 하나 들 곳이 없는 적막한 세상으로 화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더욱 더 깊은 고독을 느끼게 되는 것이 오늘날의 인간 형편입니다. 오늘의 모든 사람들은 도시문명 속에서 버려진 인간이 되어 그 어느 시대에도 볼 수 없었던 무서운 고독을 씹으면서 마침내 절망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본문 속에서 참으로 고독한 사람 하나를 만날 수 있다고 봅니다. 이 사람은 우리 현대인을 대표하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여인은 교부 유세비우스의 해석에 의하면 이방 땅인 가이사랴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즉 축복권 밖으로 버려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하시는 죄 중에 살며 구원의 선택을 받지 못하고 은총을 힘입을 수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또한 그는 여자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여자의 지위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은 인간이로되 역시 버려진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한 예로써 인구조사를 할 때에도 남자만 헤아렸을 뿐 여자와 유아는 계수하지 아니하였으며, 성전에서 예배할 때에도 여자들은 이방인 장소인 뜰에서 같이 예배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옛날 로마 군인들이 멀리 싸움터에 나가 있으므로 고향에 두고 온 아내에게 보낸 편지들이 지금도 가끔 발굴되는 일이 있는데. 그 내용 중에 이러한 글귀가 나왔다고 합니다. “내가 떠나을 때 당신이 임신 중인 것을 보았는데 지금쯤은 해산하였을 것 같소. 그 아이가 남자면 살리고 여자면 버리시오.” 이처럼 당시 여자들의 지위는 비참하였던 것입니다. 거기에다 본문에 나타난 이름없는 여인은 건강을 잃은 여자였습니다. 마가복음 5장을 참조하면 이 여자는 부인병인 혈루증으로 십이 년 동안을 고생하였으며 맡은 의원들을 찾아다니며 고쳐보려 했으나 오히려 괴로움만 더할 뿐 아무 효험도 얻지 못한 채 계속 괴로워하고 있는 불쌍한 여자였습니다. 이 때문에 그는 가진 바 재산을 다 허비하였고 친척이나 친구도, 만일에 가정이 있었다면 그의 가정까지도 그 여자를 버릴 그러한 비참한 인간이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으로부터, 모든 인간관계로부터 버려진 자이며 완전히 소외된 인간이었습니다. 이 불쌍한 여인이 예수를 따르는 많은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습니다. 물론 그 누구도 그 여인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또한 그에게 관심을 주려고도 아니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무관심하였다는 말입니다. 사실 무관심은 가장 큰 잘못 중에 하나입니다. 3부 예배까지 드리는 어떤 큰 교회가 있습니다. 천여 명이 넘다보니 교역자가 온 교우 얼굴을 다 알지 못했습니다. 어느 교인은 시골에서 집사직을 하다가 이 교회로 옮긴 지 두 달이 되었는데도 누구 하나 인사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그 교인이 눈에 띠게 커다란 밀짚 모자를 쓰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 교인을 향하여 “모자를 벗고 예배를 드리시기 바랍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자 예배를 마치고 그를 불러 “왜 순종치 않습니까”라고 질책했습니다. 그 교인이 대답하기를 “누구 하나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고 했습니다. 이 조그만 이야기에서 우리는 현대교회의 병을 봅니다. 집에서 아이를 기르다 보면 아이들이 이유없이 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리학자 말에 의하면 자기에게 관심을 끌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인 나 하나의 존재가치를 다른 사람이 나에게 보여주는 관심에서 찾으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입니다. 그래서 사랑받지 못하면 미움이라도 받아야 살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이 여인은 군중의 관심에서 완전히 버려진 인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버렸고, 세상이 그를 버렸고, 더 나아가서 자기가 자기 자신을 버린 것입니다. 여자로서 젊음의 가장 아름다운 생애로 보낼 수 있었던 십이 년 동안을 혈루병으로 고생하였으니 이 여인은 반생을 괴로움과 부끄러움으로 잃었다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녀는 스스로 절망하였습니다. 죽음보다, 병보다 먼저 버림받을 몸이라는 데에 그는 절망한 것입니다. 여인이라면 누구나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보이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고 사랑도 받으며 관심의 대상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을 중심한 중동 아시아는 물이 매우 귀합니다. 마실 물마저 귀한 형편에 목욕같은 것은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또한 철따라 옷을 갈아입고 다닐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목욕도 못하고, 옷조차 제대로 갈아입지 못하고, 또 부인병인 혈루증으로 그의 온 옷이 피가 마른 자국이 가득하니 오죽이나 냄새나는 옷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여인은 사람들과 만나려고도 아니했고, 사람들 틈에 끼지도 못할 형편이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런 병을 가진 여인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성전에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민 15:37-41, 신 22:12에 보면 이런 부인병이 있는 여자는 비록 하나님께 경배하는 성전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유로이 출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사람에게만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은 여자이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는 자유마저도 빼앗긴 이 사람의 처절한 처지는 그 누구도 위로할 수 없는 비참하고도 절망적인 심정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또 나아가서 이 여인의 부인병은 사람 앞에 아픈 부위를 내놓고 진찰이나 치료도 해달라고 할 수도 없는 부끄러운 병이었습니다. 고통에는 자랑스런 고통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겸한 고통이기 때문에 가장 견딜 수 없는 무거운 괴로움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병을 자유스럽게 말할 수도 없고, 또 병이 밖으로 나타나는 병이 아니라 속으로 파고드는 병이기 때문에 매우 괴로운 병이었습니다. 이런 불쌍한 여인이 예수님에게 나아왔습니다. 그러나 감히 예수님께 할 말이 없었습니다. 예수 앞에서는 장님도 눈을 뜨고, 심지어는 문둥이도 깨끗함을 받았고, 열병도 나았습니다. 끄러나 이 여자는 예수님 앞에까지는 왔으나 차마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말로 형언키 어려운 병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떳떳하게 “저는 ××병입니다. 불쌍히 여기시어 고쳐 주옵소서”하고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그녀가 취할 최선의 방법은 뒤로 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높으심을 알고 나의 버림을 깨달아 “내가 무엇이기에”라는 고백을 하면서 주님 앞에 거꾸러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경건한 신앙으로 만진 것입니다. 그때 이 여자의 병은 나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능력이 나감을 아셨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사실상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급히 가시던 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걸음을 멈추어 이 여자를 찾으신 것입니다. “내게 손 댄 자가 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는 언짢은듯이 많은 사람에 밀려 옷깃이 스칠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어쩌다 옷깃을 스친 정도의 사람을 찾으신 것이 결코 아니고 오직 경건하게 믿음으로 변화될 것을 믿고 옷을 만진 사람을 찾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어쩌다 교회 구경나온 교인을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경건하게 주 앞에 나와 말세에 사는 성도로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열심히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께서는 친히 만나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군중 속에 버려진 이 가련한 여인을 찾으신 것입니다. 또 찾았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말씀합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주님께서 “내 능력이 너를 구원했다”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또한 큰 축복의 말씀입니다. 큰 은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믿음에 대한 인정이요, 믿음 위에 더해 주시는 축복입니다. 이 여인은 전설에 의하면 고향 가이사랴에 돌아가서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고쳐주셨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사하여 기념비를 세워놓고 오고 가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일생동안 증거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귀한 생입니까 가장 비참하던 자가 가장 높임을 받는 존재로 바꾸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나아갈 때 그로부터 새롭고 가장 귀한 생을 부여받게 될 것이며, 자신을 온전히 그에게 드림으로 영원히 영광된 생명으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주 앞에 나아가 우리의 영적문제, 영적 병을 다 고칠 수 있기 바라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도다”, 이 귀한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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