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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브라함의 개명 (창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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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이름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계시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완전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그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는 겸손과 복종과 신앙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보시고 이번에는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 고쳐주셨습니다. 아브람이란 이름은 한 가정에 있어서 고귀한 아버지라는 뜻이요,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으로 놀라운 축복과 약속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이름은 예언적인 이름이 되어서 그 당시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고, 또한 안다고 해도 믿지 못할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 후 4,000이 지난 오늘에는 그 예언의 이름대로 열국 민족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게 되었고 하나님은 그의 믿음에 자손인 우리들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의 기업적인 가나안 땅도 그 후 400년 만에 그 자손들에게 허락하시어 점령하게 하였고, 지금도 아브라함의 육신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그의 신앙의 후손들이 영원한 가나안 복지에 살게 될 것입니다. 본문 말씀의 배경을 살펴볼 때 하갈이 광야에서 돌아와 이스마엘을 출산했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85세였습니다. 그의 나이 99세였습니다. 그러므로 13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나님으로 부터 위로도 계시도 없는 침묵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영계의 사람이 10여년이 넘도록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다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얼마나 고적한 생활이었음을 추측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시 28:1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 내게 귀를 막지 마옵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기간 동안 앞서 뿌린 불신앙의 보응을 받으면서 반성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는 99세의 노경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은 그제야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란 새 이름으로 개명한 것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의를 차지합니다.

1. 내 앞에 완전하라

아브라함은 하갈을 통해 약속의 자녀를 받으려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13년이 지나 그는 노쇠하여 자신으로는 생산 불가능을 인정하고 단념상태에 있었습니다. 그 때 여호와께서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은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즉 엘샤다이라고 하였습니다. 엘은 하나님이란 말이요, 샤다이는 시리아 말로 유방이라는 뜻인데 생산을 의미합니다. 랍비들의 해석은 “만족한 하나님”, “충분한 하나님”이라 했으며 헬라역 성경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중요한 시점에서 자기의 이름을 계시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자녀를 주실 때 창 17:1에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하셨으며 모세에게 사명을 주실 때에는 출 3:16에 “여호와 하나님”이라 하셨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완전해지라는 말은 완전한 선을 이루라는 말인데 마음과 뜻과 행동과 인격 전부가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완전의 본체인 하나님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의식할 때 하나님의 완전에 접근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완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완전에 접근해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마 5:48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예수께서 요구하신 완전은 사랑입니다. 본문에 하나님 앞에 완전하라 하신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이외에 그 무엇에도 관심을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가 만일 어떤 사람이나 물건에 관심의 촛점을 모으고 있다면 나는 벌써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나 물질에 의지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내가 무엇을 목표하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목표에 따라 전진의 방향과 방법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길을 막는 역경을 헤치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행하는 길 뿐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 뜻에 순종하며 그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2. 아브라함이 엎드린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행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피조물로서 창조주에 대한 의무요 본분입니다. 이 본분이 완전에 이르렀든지, 이르지 않았든지 그것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은 은혜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선포하십니다. 복음은 이미 창세기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 무상의 은혜와 축복의 선언 앞에 아브라함은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엎드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태도야말로 진실된 겸손의 표현이며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의 자세입니다. 아브라함이 만일 자기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자신에게는 큰 축복을 받을 아무런 보장이 없었습니다. 그는 노쇠하여 생산이 중단된 노부였습니다. 자기 안에서도 아무런 가능성도 기대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눈을 들어 전능하신 하나님만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엘샤다이”의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능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고자 하는 심령으로 무릎을 끓은 것이었습니다. 창 16장의 아브라함과 창 17장의 아브라함을 대조해 보면 흥미있는 점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16장의 아브라함은 자기 앞에 자연적인 생산법칙을 중요시했고, 17장에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16장의 아브라함은 행동적이라면 17장의 아브라함은 예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16장의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과 사라의 제안에 의지했으나 본 장에서 아브라함은 자신과 장래 모든 문제를 전능하신 하나님에게 맡기고 오직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 자신을 통하여 역사하시기를 소원했습니다. 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신 말씀은 곧 언약의 말씀으로 (1)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언약(4절) (2) 열국에 대한 언약(6절) (3) 자손에 대한 언약(7절) (4) 가나안 복지의 언약(8절) (5) 영원한 기업의 언약(8절하) 등입니다.

3. 네 이름을 아브라함이라 하라

5절에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말고 아브라함이라 하시니 너희로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성별된 증표로써 새 이름을 주었습니다. 구약시대에 한 개인이 환경이나 사업 또는 성질과 인격이 변화될 때 새 이름을 취했습니다(창 32:28). 신약시대에도 그런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 요한, 야고보는 모두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새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브람 “높으신 아비” 대신에, 아브라함 “많은 무리의 아비”란 이름을 주었습니다. 창 17:15-16에 보면 아브라함 아내 사래에게도 개명을 명하셨습니다. 즉 사래를 사라 “만민의 어미”라고 고쳐주셨습니다. 이제 아브라함 부부는 새 이름을 받음으로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에 들어갔고 그들의 생애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되었습니다. 16절에 “열 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하신 말씀대로 사울, 다윗, 솔로몬, 그 외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이 모두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낳고, 왕 중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자손(마 1:1)이란 것도 약속의 성취이며 훗날 천년왕국시대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노릇할 백성들도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일 것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긴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모든 것을 책임져 주셨듯이 오늘 날 우리들도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맡긴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앞길을 인도하시고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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