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생각하는 마음 (대상 11:10-19)

첨부 1


여기 본문에서 말하는 생각하는 마음이란 연구나 사색이나 명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아껴주고 이해하여 주고 높여주고 위해주고 돌보아 주는 아름다운 마음씨를 의미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동안에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있는데 특별히 부지중에 남을 생각해 주는 마음을 잃어버린 것이 가장 큰 문제이기 때문에 본문은 우리에게 남을 생각채주는 마음을 회복하라는 교훈인줄로 생각합니다. 사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취임한 다윗에게는 할일이 태산같았습니다. 그중에도 사울 시대에 빼앗겼던 국토를 회복하는 일이 긴급한 과제였습니다. 실지 회복을 위해 블레셋과 전쟁이 치열하던 어느날 왕이 진두지휘를 하다가 갈증을 느껴 베들레헴의 우물물을 먹고 싶다 했습니다. 3부하 군인이 적진을 뚫고 들어가서 물을 길어다가 드렸습니다. 이 물을 받아 마시려던 왕은 문득 무슨 생각을 했는지 두 손을 떨면서 “이 물은 물이 아니요 저들의 생명이요 피니 내 어찌 이 물을 마실 수 있겠는가” 하면서 감격에 벅차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렸습니다. 이 아름다운 서사시의 제목을 무엇이라 할까 하다가 “생각하는 마음”이라 붙여봅니다.

1. 나라 생각하는 마음 노심초사가 지나치면 갈증이 오게 마련이고 갈증을 느끼게 되면 전쟁터에서라도 물을 마셔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베들레헴 우물이라 했습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입니다. 베들레헴이 블레셋 군대에게 짓밟히고 있는 것입니다. 참을 수 없습니다. 어서 블레셋 군대를 내쫓고 하루 빨리 내 땅을 찾아가야 할 터인데 일일이 여삼추로 초조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애가 탄 나머지 “아 누가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나로 마시게 할고” 하고 부르짖게 된 것입니다. 나라를 생각하는 뜨거운 마음을 여기에서 배웁니다.

2. 지도자를 생각하는 마음 용사 중에서 3사람이 물을 가져오겠다고 일사각오로 나아간 것은 아첨도 아니요 생명을 바친 충성심에서 지도자를 위한 일이라면 죽음도 불사했던 값진 일들로 아무나 할 수 있었던 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니느웨 백성들도 지도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충만할 때에 그 민족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은 천사가 메세지를 전했을 때 듣지 않으므로 멸망당했습니다. 중이 제 머리 못깎는다는 속담처럼 장군도 저 혼자서는 못되며 지도자로 받들고 섬겨주는 삶이 있어야 됩니다. 요즈음 윗사람을 받드는 마음이 점점 희박해지고 있습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자녀, 스승을 멸시하는 제자, 기성세대를 깔보는 십대, 지도자를 푸대접하는 사회, 교역자를 괴롭게 하는 교인 등은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지도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어야겠고 특별히 교역자를 귀히 여기는 교회가 되어야겠습니다. (1) 언어로도:교역자가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이상 거기에 해당하는 예의가 따라야 합니다. 목사, 전도사를 둔다는 말이 아니라 모신다는 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마음으로도:교역자를 하나님의 사자로 알진데 고넬료가 베드로를 모시는 그런 심정으로 존경하고 귀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3) 물질로도:목사는 가난하고 궁하게 살아야 되는 것인 줄 알고 재력있는 교회에서도 목사에게 으례히 고생시킴은 잘못입니다. 자기네 생활은 백만원 생활비든다면서 목사 생활 십만원으로는 많다고 입을 벌림은 잘못이 아닙니까 그러기에 목사 아들이 목사되는 예가 적습니다.

3. 아랫사람 생각하는 마음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받아 마시려던 다윗 왕은 그 물을 길어온 세 사람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물을 땅에 쏟아버리고 말았습니다. 회롱이냐 연극이냐 이것이 어떻게 길어온 우물물이라고 함부로 버리느냐 이것은 아랫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눈에 보이는 이 물은 적진을 뚫고 들어가서 우물물을 길어 오느라고 좌충우돌하며 칼에 맞고 창에 찔려 유혈이 낭자한데 그들이 길어온 물은 물이 아니라 차라리 피였습니다. 신복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가서 길어온 우물물이 차마 목에 넘어갈 것 같지 않아 쏟아버린 것입니다. 신하를 사랑하는 어진 마음입니다. (1) 위정자는 국민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옛날 숙종 대왕은 민가의 굴뚝에서 연기가 오르지 않은 날에는 백성의 굶주림을 생각해서 수라상을 물렸다고 합니다. 이런 통치자 밑에서라면 국민은 굶어도 흐뭇해 합니다. 그러나 국민을 생각지 않고 자기만의 사리사욕에 급급한 지도자 밑에서는 사실 고생이 억울합니다. (2) 기업주는 종업원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국가경제 몇%성장이나 자랑하고 그 경제 개발의 제 일선에서 투쟁하는 노동자의 임금이 최저임금이고 노동자의 생활이 비참하다면 기업주의 양심 문제요, 국제 무대에서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모든 복지 향상을 위해 기업주들은 종업원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3) 교역자는 교인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이비한 신앙 운동에 쏠리고 있는 교인들을 규탄만 할 것 아니요 저들의 갈급한 심정을 생각해주고 거기에 좋은 꼴을 보급하도록 노력할 일입니다.

4. 하나님 생각하는 마음 다윗은 그 물을 땅에 헛되이 쏟아버린 것이 아닙니다. 18절에 “여호와 하나님께 부어드렸다”고 했습니다. “이 충성 이 영광을 내가 감히 황송해서 도무지 받을 수가 없사오니 하나님께서 받으시옵소서” 하며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것은 확실히 여호와 하나님을 생각하는 고상한 마음씨입니다. 사람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을 잃게 하는 거침돌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고통이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형통이라는 것입니다. 형통만 하면 하나님 잘 믿을 사람인데 산 넘어 또 산으로 고통이 꼬리를 물고 닥쳐오기 때문에 지쳐서 하나님을 차차 잃어가는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너무 만사가 대통해서 하나님을 점점 멀리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 다윗은 형통, 고통을 다 겪어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형통의 날에도 고통의 날에도 하나님을 잊은 일이 없습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니이까” 하고 고통의 밑바닥에서도 하나님을 찾아 매달렸고 “주께서 받으소서” 하고 형통의 날에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곤고하면 곤고 때문에, 형통하면 형통 때문에 하나님을 잃고 사는 연약한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 생각하는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서로 생각해 주는 마음이 있다면 사막도 옥토가 되지만 서로 이기적이기만 하면 천국도 지옥이 됩니다. 서로 서로 생각해 주는 마음을 다시 찾아서 사막 같은 이 세상 고해와 같은 오늘을 그리고 이 사회에, 교회에, 가정에 샘물이 흐르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