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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엠마오로 가는 길 (막 1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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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무덤 문을 여시고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돌아가신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시고 영원히 살아계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명과 부활이 되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요 영원한 소망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활의 사실과 신생의 신앙의 갖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우리의 실존은 불안하고 우리의 가슴엔 근심이 있고 우리의 환경은 어두워서 현실에서 실제적으로 달라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에게서 고달픈 걸음을 걸어서 삶의 길을 터벅터벅 걸어가는 엠마오로 걸어가는 두 제자의 모습이 발견되어집니다.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의 길을 걸으면서도, 겟세마네 동산으로 걸으면서도, 골고다로 걸으면서도, 묘지도 걸으면서도, 엠마오로 걸어가면서도 회의와 불안과 절망으로 휩싸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활과 생명의 신앙을 등지고 불안과 근심과 절망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실, 부활의 사실은 우리가 이성으로 긍정하든 부정하든 우리의 현실 생활과는 유리되어 있고 십자가와 부활의 교의는 승인하며 가르치고 배우기도 하지만 우리 생활 깊은 곳에 신앙이 되어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오늘도 그대로 근심과 고통과 죄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오늘도 서울 거리에 나가서 길가는 사람을 붙들고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많은 사람이 고개를 내젓습니다. 한국의 땅 어느 고장, 어느 길에서 동포를 붙들고 물어봐도 근심하는 마음과 얼굴을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모두가 바라던 기대가 어긋나서, 사랑을 잃어버려서, 진리가 가리워져서, 정의가 땅에 떨어져서 살아갈 의욕도 희망도 잃고 슬프다는 독백이며 대화일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도 그래서 고민하는 젊은이, 근심하고 슬퍼하는 어두운 시대에 사는 햄릿이었던 것입니다. 주께서 “너희가 길을 가며서 서로 주고받는 얘기가 뭐냐”고 이들에게 물으십니다. 그들은 “침울한 얼굴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표정, 현대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로 그들이 인생의 길, 역사의 길, 세계의 길을 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대화가 무엇이겠습니까 서울로 가는 길, 농어촌으로 가는 길, 공장으로 가는 길, 학원으로 가는 길, 직장으로 가는 길, 교회로 가는 길에서 주고받는 이야기는 무엇이겠습니까 너와 나의 대화, 크고 작은 모임에서, 당회에서, 노회에서, 총회에서, 교회협의회에서, 국회에서, UN총회에서 “너희가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묻는다면 뜻있는 사람의 대답은 역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한 대답을 할 것입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산다면서 최근에 거기에 되어진 일을 모른단 말이요”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의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이는 우리의 소망이었는데 그 소망이 이제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결박하여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습니다. 모든 것은 끝났습니다. 말세입니다. 악인이 의인을 죽이는 세상입니다. 불의가 의를, 사랑을, 참을 죽이는 시대요, 폭력이 생명과 인격을, 전쟁이 평화를, 죄악이 자유를 죽여서 무덤에 매장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오늘이나 그때나 인간이 사는 세계의 실상은 일반이란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정의는 패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실상 정의는 짓밟혔으며, 평화가 온다고 말하지만 세계 도처에 싸움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한 예수를 생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 주님께서 타이르시며 깨우쳐 주십니다. “너희는 미련하구나. 예언자의 말을 믿지 못하는구나.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아야 영광에 들어갈 것이 아니냐.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느냐”고 하시는 것입니다. 진리를 위해 죽는 사람이 있어야 진리가 살며, 사랑을 위하여 죽음을 두려워 않는 사람이 있어야 정의가 살며,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제물이 되는 사람이 있어야 자유와 평화가 옵니다. 그래서 부활의 복음은 고난과 십자가를 전제하므로 선포된 복음이며 계시된 진리입니다. 주님의 이런 설교를 들을 때 제자들은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이 진리를 깨닫게 될 때 그들은 영의 눈이 떠져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보게 되고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다변의 문제나 교리 승인이나 사건 긍정이나 그것을 증명하는 문제보다 그이가 우리에게 찾아와 만나게 됨으로 일어나는 사건, 말씀을 듣는 일, 성경을 통해서 일어나는 성령의 역사인 사실의 체험을 의미합니다. 즉 죽지 않고 살아나신 그리스도는 기쁨과 신생의 능력이 되어 우리가 어떤 근심이나 고통, 죄악과 죽음의 함정에 빠져 절망적인 인생길을 걸어가던 우리에게 각성과 믿음, 용기와 사랑, 소망과 환희를 소유하는 신생의 실제로 들어가는 변화를 가져오게 하는데 중대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우리에게 현재적인 신앙을 일으켜서 영적 생활을 부활시키고 인간정신을 부활시켜서 참된 생활에 들어가게 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내가 옛 사람과 그 행위로 십자가에 죽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다시 살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굽살라 대회 보고에서도 급격히 변천하는 세계에서 세계의 문제와 사회참여가 열심히 논의되면서도 예배의 문제와 성례전의 문제를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말씀과 성례전이 살아있는 교회란 말은 바꿔 말하면 성령이 역사하는 성서의 진리와 성례전을 통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안에 살아있는 공동체를 말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가슴 속에서는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솟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불이 타서 뜨거워 견딜 수 없는 생의 전환이 왔습니다. 그들은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서 완전히 변화된 삶을 다시 살게 됐습니다. 톨스토이는 그의 위대한 작품 “부활”에서 네프류도퓨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결심을 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네프류도프는 시베리아 유배의 땅에서 남포불 아래 성서를 펴놓고 산상보훈(마 5:21-48)에 나오는 사랑의 계명을 읽으면서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크나큰 기쁨이 가슴에 넘쳐 흘러옴을 느꼈습니다. 그는 그 밤을 뜬 눈으로 세웠습니다. 이날 밤 이후로 네프류도프의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렇듯 톨스토이가 내일을 향한 오늘 신생의 생활의 출발을 그리면서 부활이라고 믿는 것은 부활의 현재적 신앙에 대한 깊은 이해라고 생각합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도 삶의 부활이 일어난 것입니다. 만남으로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이 떠져서 주님을 보았습니다. 견딜 수 없이 끓어오르는 감격이 몰려와 엠마오 길을 뛰어서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나도 주를 보았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증거했습니다. 사람이 변했습니다. 회의와 절망도 사라지고 새 생명과 힘이 넘쳤습니다. 만남에서 일어난 부활의 기적입니다. 이런 부활의 기적이 여러분에게도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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