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헌금 봉헌의 세 가지 원리 (고후 08:6-8)

첨부 1


1. 헌금은 보이지 않는 신앙의 구체적 표현입니다 (1) 신앙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구체적 증거가 헌금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헌금하는데 인색해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말씀에 은혜받았다 하면서 헌금하는데는 인색할 수 있겠습니까 신령한 지식이 있다는 자가 헌금에 대해서 인색할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을 위한 간절함과 사랑이 있다고 하면서 헌금에 인색할 수 있겠습니까 아닙니다. 반드시 믿음이 있다면 행함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약 2:26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들이 가진 참 신앙은 헌금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2) 헌금 장려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신앙을 격려하기 위하여 헌금을 강조하는 것은 절대로 잘못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강요가 아니라 장려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헌금을 장려하면서 명령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헌금은 은혜받은 자들이 자원하여 기쁜 마음으로 내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에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고 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볼 때도 헌금이란 성도 자신의 축복을 위한 것이므로 강요라든지 짜낸다는 표현은 잘못된 표현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3) 남의 헌금한 것을 들어 장려해야 합니다. 흔히 목사나 부흥사가 헌금에 모범이 되는 어떤 특정한 성도나 교회를 예로 들어 헌금을 장려한다는 것은 잘하는 일 중에 잘하는 일입니다. 본문에 바울이 마게도냐 교인들의 헌금한 것을 들어 고린도 교인들에게 헌금을 장려한 것을 보시기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그전에 고린도 교회가 기쁘게 헌금하기로 작정한 것만 가지고도 각처에서 바울이 예를 들어 각 교회에 헌금을 장려하기도 하였습니다(고후 9:3). 헌금은 타인을 들어 이를 장려하는 것이 성경적이며, 또한 이것은 헌금 장려의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의 치약왕 콜게이트씨는 어릴 때 점원으로 취직을 했을 때부터 온전한 십일조를 하여 하나님께 축복을 받으므로 미국의 굴지의 재벌이 되었고, 현재는 10분의 8을 주께 드려 주의 일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2. 우리 주 예수님이 본보기가 되셨습니다 (1) 부요하신 자로 가난해짐. 예수님은 지위로 보아서는 부요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빌 2:6에 “그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시나 동등됨을 처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하였듯이 그는 본래의 지위를 취하지 않고 만물의 지배를 받는 자리에 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그에게는 만물을 풍요롭고 충만케 할 수 있는 권능이 있었으나 그것을 취하지 않고 자기를 비어 우리와 같은 몸이 되신 것이었습니다. (2)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심.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지 않고 자기를 비어 우리와 같은 죄의 몸이 되어서 가난하게 되신 것입니다. 그는 스스로 자원하여 인간들의 가난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어디까지 자신을 낮추셨습니까 빌 2:7에 보면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종이라는 말은 노예라는 뜻으로 예수님은 인간 중에도 가장 비천한 존재인 노예로 낮아지셨다는 말입니다. 나중에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어 십자가의 제물이 되기까지 하셨으니 이 얼마나 비천한 낮아짐입니까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가난함입니다. (3) 왜 가난해져야 했습니까 주께서는 우리의 죄과를 위하여 온전히 자기를 비우시고 온전히 자기를 제물로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노예처럼, 그리고 제물처럼 당신의 몸을 속죄 제물로 바쳤으니 우리의 가진 물질을 드린다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의 속죄 희생으로 우리는 비로소 영적, 육적 풍성함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풍성하고 영광스런 영원한 삶은 오직 주님의 가진 희생의 대가임을 우리가 알아 우리의 물질을 주께 드리는데 인색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3. 광야의 만나를 거두는 비결 (출 16:17-24) (1) 물질의 만나를 거두는 것. 많이 거두거나 적게 거두어도 그날의 양식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탐욕으로 많이 거둘 때 그것이 부패하여 구더기가 생겼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만큼 가지는 것으로 만족하여 주께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탐욕으로 물질을 축적하면 그것은 썩기 마련입니다. 좀과 녹이 생기기 마련이고, 도둑이 구멍뚫기 마련입니다. 축적한 것이 없으면 도둑이 들어와도 염려가 없습니다. 도적이 가지고 갈래야 가지고 갈 것이 있어야 가지고 가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도둑도 동정하고 돌아갈 형편이라면 어떻겠습니까 (2) 헌금은 성도들로 균등케 합니다. 이것은 공산주의자들의 이론과 같이 강제적 공동분배가 아닙니다. 오늘은 내가 부하니 너를 도와주고 내일은 네가 나를 도와주는 생활로 조화를 이루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서 신자된 자가 자기의 재산을 팔아 교회 안에서 핍절한 자가 없도록 바쳤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광야에서 만나를 거둔 일을 비유로 말하는 바울의 관심을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가나안 복지를 향한 우리 성도들은 서로 도와 공존공생하였다는 것을 기억하여 부한 자는 가난한 자를 위해 힘껏 봉사해야 하겠습니다. (3) 공산침략을 사전에 방지합시다. 얼마 전 부산에 온 중공 영내 선교단체의 처녀 선교사들을 상면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설교가 끝날 무렬 진지하게 교우에게 “여러분의 재물을 가지고 조속히 구제에 힘쓰십시오. 만일 여러분의 재물을 나누어 주지 않으면 앞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억지로 그 재물을 빼앗을 날이 올 것인줄 어찌 알겠습니까”라고 한 말을 기억합니다. 이 말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헌금도 내 손에 물질이 있을 때 해야 합니다. 이 다음에는 물질이 없어 드리지 못해 후회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새벽 일찌기 나가 식구들이 먹을만큼 만나를 거두어 들였던 것처럼 여러분도 매일 새벽 제단을 쌓고 근면히 일하여 남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