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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회 속의 교회 (막 0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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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중국의 시인 소동파는 산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가 산을 읊은 시 가운데 다음과 같은 내용을 가진 것이 있습니다. “크고 아름다운 산일수록 사방에서 관찰해야 하고 그리고 들어가 보아야 하며 정상에까지 올라가 보아야 그 산을 알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아는 데에도 소동파가 산을 관찰한 방법과 같은 방법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의 생애를 앞과 뒤, 안과 밖, 교훈과 생활, 삶과 죽음 등 그의 전 생애를 여러 각도에서 세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를 소경이 코끼리 더듬기 식으로 함부로 붙여서는 안 됩니다. 본문 말씀에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지나가시다가 풍랑을 만나셨으며, 그리고 그 풍랑을 잔잔케 하셨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바다의 얼굴은 웃었다가 울고 잔잔하다가 다시 격동하는 순서를 끝없이 반복하기 때문에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건너야 하는 세상이라는 바다도 예외는 아닙니다. 건너가는 기간이야 길든지 짧든지 격랑 속에 흔들려야 하고 노도 속에 신음해야 합니다. 칸트는 “우리는 이 세상에 온 것은 평안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다”는 말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주님에게 주목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임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1. 친구인 예수 성서에서 살펴보면 배 안에서 주무시고 계신 예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무셨다는 말씀은 휴식을 필요로 하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피곤을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배 안에서 주무실 때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그가 얼마나 인간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거리감을 두고서는 친구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에게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어떤 친근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는 우리와 똑같이 육신적으로는 추위와 더위를 느끼며 주림과 갈증을 느끼며 휴식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누구보다도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태양광선이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에 육안으로 직시할 수 없는 것처럼 만일 주님이 너무 지존하시고 지엄하시기만 했다만 우리는 그와 접근할 수 없는 어떤 거리감을 그에게서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소박하고 서민적인 생활 때문에 “친구여”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어부의 친구요, 병자의 친구요, 가난하고 무식자의 친구였습니다. 심지어는 어린이의 친구요, 죄인의 친구까지 되셨습니다. 우리들 중에 아직도 예수님을 귀족적으로 경원하고 있다면 그는 아직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경원받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는 우리와 무릎을 맞대고 기탄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무섭고 떨리는 격항 속에서도 이렇게 다정하신 친구를 곁에 모시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아야 합니다.

2. 스승인 예수 풍랑 속에서 예수의 깊은 잠은 하나님께 대한 그의 깊은 신뢰를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는 제자들이 흔들어 깨울 정도까지 깊은 잠에 빠졌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광풍 속에서도 평안하게 주무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험한 바다 속에서, 흔들리는 배 안에서도 아무 일 없는 듯이 평안한 얼굴로 주무시고 계신 주님의 모습은 제자들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어떤 존경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주님의 이토록 침착하시고 초연하시고 태평한 모습이 제자들에게 주님을 향하여 “선생님이여!”라고 서슴없이 부르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위대한 분입니다. 주님은 친근감을 주는 친구이면서 동시에 무한한 존경심을 갖게 해주시는 스승이신 것입니다. 친구끼리는 가까이 사귀기만 하면 되지만 스승에 대해서는 배우고 본받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예수님에게 배운 베드로는 후일에 복음을 증거 하다가 잡혀서 옥에 갇혔을 때 천사가 그의 옆구리를 쳐 깨워야 할 정도로 처형 전날 밤에도 단잠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행 12:). 이런 신앙생활은 모든 주님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주님은 친근한 친구이시며 동시에 스승이 됨을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는 배우고 본받아야 할 위대한 선생님의 일면을 그에게서 봐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잠잠하라 고요하라” 주님의 명령일하에 흉용하던 바다는 삽시간에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제자들은 놀라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부르짖었습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움 속에는 경외를 포함하는 말과 신앙인이 갖는 자세가 있습니다. 즉 제자들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를 친구로 발견하고 또 나아가 스승으로 발견하고 더 나아가 神으로 정진하여 발견한 것입니다. 실로 예수님은 존경할 스승일 뿐만 아니라 믿고 경배할 神이며 또한 성자인 하나님의 아들로 모시며 나의 구주로 그의 발 앞에 예배하는 자리에까지 도달해야 합니다. 풍랑에 흔들리는 일엽편주 안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란 것입니다. 우리는 풍랑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제자들을 주시했고 제자들을 주시하던 눈을 돌려 다시 예수님을 주목했습니다. 우리는 친구로서의 주님, 위대한 스승으로서의 주님도 발견했고 다시 구세주이시며 하나님이신 주님도 아울러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는 이 사회에 대해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1) 교회와 사회와의 벽을 헐고 대화의 길을 열어 사회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친근감을 갖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정신이며 세속화의 핵심일 것입니다. (2) 교회는 사회가 배우고 본받고 존경할 만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친구가 된다는 것은 반드시 사회악과의 동화나 불의와의 타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반드시 사회에 대해서 예언자적이어야 합니다. 사회는 교회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마음으로 존경하고 본받고 따라와야 합니다. 그러나 근년에 한국 교회는 그 위신을 거의 상실해 버린 형편입니다. 교회가 세상처럼 되거나 그에 미치지 못한다면 교회의 구실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사회의 빛 되신 선생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교회로서 교회는 존엄성과 신실성을 이 사회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는 산 증거와 권위와 영광과 능력과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약간의 존경을 받는 것으로는 미흡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로서 추앙되고 신임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세속은 부단히 교회를 향하여 거리감 없이 자기들처럼 되어 주기를 요망하고 있으며 교회 역시 사회와의 대화를 위해서는 세속화, 토착화 하는 것이 당연한 과정일 수밖에 없으나 막상 비종교화의 친절 밑에 이적도, 십자가의 대속도, 부활도, 내세도, 모두 삼손이 데릴라에게 머리털이 다 깎였듯이 다 깎아 잘라내고 나면 대관절 남는 것이 무엇이며 사회에 대해서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세상으로부터 받을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교회는 사회와의 대화의 길을 열어 사회의 친구가 되어 주는 일에 성실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만이 가진 나실인으로서의 독특한 능력의 머리털까지 반드시 잘라버려야 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독특한 이 보배롭고 신비한 머리털은 그대로 지니고 나아가면은 사회와의 접근하는 길을 찾아서 봉사하는 것이 사회 속에서의 교회의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혼란이 극심해 가는 현대의 격랑 속에서 교회는 이 사회의 친구로 대화하고 스승으로 존경받으며 하나님의 교회는 추앙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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