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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유혹에 빠지지 말라 (딤전 06: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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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기도하고 주의해야 하는 것이 교역자에게는 필요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다시 한번 디모데에게 교역자가 조심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거짓 교사의 거짓 가르침에 조심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근본으로 하는 교회에 그 외의 다른 교훈이란 금물이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교훈 하시기를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마 24:23-27)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것은 주님의 마음을 아프시게 하는 것입니다. 교역자는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을 공급해야 한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해야 합니다. 교훈은 설교나 학설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도덕생활까지 보아야 그 교훈의 진위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 바른 교훈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다 고 했습니다. 옛날 초대교회 당시 거짓 선교사들이 많이 있었고 교회에는 이리저리 배회하는 예언자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특히 궤변론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을 극적으로 선전했습니다. 그래서 마치 유명인과도 같은 수천 명씩 끌어 모았던 것입니다. 필로스트라터스에 의하면 그들 가운데 가장 유명했던 아드리안은 인기가 대단해서 그가 연설한다는 소식이 들리면 의회나 서커스 등은 휴업 상태에 들어가고 그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으려고 아테네 신전으로 모여 들었다고 합니다. 헬라인들은 그의 언변에 매혹되었습니다. 헬라인 사이에서는 누군가 언변이 좋으면 행운이 따랐던 것입니다. 이 같은 사회 배경 속에서 교회는 성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형태의 거짓 교사가 교회로 스며든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통하여 그들의 속된 재능을 사용하여 위신을 얻고 이득을 취하였던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에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자만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한 설교자와 교사들이 오늘날에도 많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의 학식에 의한 견해를 사람들에게 인식시키는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알기 어려운 공론에 치중합니다. 오늘날 실제적인 신앙보다는 난해한 토론에 관심을 빼앗기고 있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성서 연구회나 교리 연구회에 속해서 토론을 즐기고 있다고 하여 그것이 크리스챤의 자격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세 째로 거짓 교사는 평화를 혼란케 합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호전적입니다. 교회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가지고 논의에서 지는 경우에는 상대방의 신학을 비평하고 심지어 그의 성격에 대해서도 비판합니다. 그들과의 토론은 언제나 언쟁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들은 자기와 다른 의견이나 비판을 한결같이 모욕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입니다. 네째로 거짓 교사는 종교를 상품화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르침이나 설교를 소명 이라 생각하지 아니하고 장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선전하기 위해서 그 일에 종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회서신은 분명히 일하는 자는 그 보수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의 동기는 공공의 봉사라야 하는 것이지 개인의 이득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일하는 자들의 정열은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및 신앙인들을 섬기기 위해서 쓰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2. 허영심에 조심하라 하였습니다. 이 허영심도 다른 교훈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이니 옛날 보천교(普天敎)의 교인들이 계룡산에 찾아가 정도령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이 진리가 아닌 사실로 사람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허영심이란 사람이 일확천금을 도모하는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요즘 여호와 증인들의 유혹에 넘어가거나 이단 종교에 빠진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들은 허영에 들떠 부모, 처자도 안 돌아보고 교회를 외면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진리에 입각하여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무슨 만족을 얻고자 함은 크나큰 잘못입니다. 이 세상에는 만족이 없기 때문입니다 500만원 필요한 사람과 5만원만 있으면 족하다는 사람과는 가난한 것은 매 한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만족이라고 하는 것은 인생에 대한 내적인 마음자세에서 오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만족할 줄 모르는 자는 큰일에도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유대 랍비가 되려면 자기 자신의 운명과 생활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빈손으로 왔으니 갈 때도 빈손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갈 때 두 가지밖에 가지고 갈 것이 없습니다. 그 하나는 내 자신이요, 또 하나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허영을 다 버리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참 만족을 찾아야 할 것 입니 다.

3. 돈을 사랑하는 위험에서 조심하라 하였습니다. 금전은 인생살이에 있어서 가장 필요하면서도 사람을 미혹하는 물건 중에 하나입니다. 대체로 금전을 유용하게 잘 쓰면 가장 선한 것이 되지만 만일 잘못 쓰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것이니 금전만능에서 살지 말고 신앙 만능주의에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버러지 눈을 가진 민족은 망하고 새의 눈을 가진 민족은 번성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요행이나 기회를 버리고 부지런히 주어진 일에 충성할 때 개인의 부귀와 국가의 번성을 가져온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은 동물이 갖지 못한 영혼을 소유하고 또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육체를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썩어질 양식을 위하여 수고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 할 것입니다. 돈은 그 자체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닙니다. 단지 돈을 사랑함으로써 나쁘게 변할 수도 있기 때문에 위험한 것입니다. 금전으로 자기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쓸 수도 있으며 곤경에 빠져있는 불쌍한 이웃을 구제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돈의 위험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을 만들어 냅니다. 로마격언에 "돈은 바닷물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바닷물을 마시면 갈증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갈증이 더해짐에서 비유한 말입니다. 둘째로, 부귀에 대한 욕망은 환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부귀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건강을 해치기도 하며 사랑이 메마른 인간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세 째로, 부귀는 인간으로 하여금 이기적으로 만들기 쉽습니다. 돈 때문에 경쟁심을 유발케 되어 비겁한 수단을 쓰게 되고 상대의 피해는 생각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믿지 못하고 악한 사회를 조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네 째로, 돈에 대한 사랑은 그릇된 방법으로 돈을 버는 길에 사람을 끌어 들이기 쉽고 결국에는 고뇌와 자책으로 시달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 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독립해서 살아가는 길을 탐구한다든가 자신의 부채를 갚기 위해서 노력하거나 가족들을 위해 내 집 마련의 계획 등은 기독교인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든지 금전으로 평가한다든가 돈을 위해 인생의 장래를 계획하는 것은 가장 위험한 죄악의 길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우리 믿는 신앙인들은 돈에 대한 애착은 갖되 그것을 통하여 선한 일과 주님 사업의 영광을 돌리는 일에 쓸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고 절제하는 생활을 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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