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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혼의 닻 (히 06: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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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부터 이 세상을 바다에 비유해서 생각한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을 고해(괴로운 바다) 같은 세상이라고 말한 글은 그 대표적인 것입니다. 즉 우리 인생이란 이 풍파 높은 바다에서 떠다니는 한 일엽편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망망한 바다에 한 조각배와 같은 것이 인생이라고 한다면 그 배에는 꼭 있어야 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닻입니다. 큰 파도가 일어날 때 닻이 깊은 바다 밑에 박혀 있어야 배가 밀리지 아니하고 파선을 면할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고해와 같은 세상을 지나가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꼭 있어야 할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소망입니다. 소망은 닻과 같다고, 그래서 옛날부터 닻은 소망의 한 상징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배마다 닻이 있습니다. 작은 배는 작은 닻, 큰 배는 큰 닻이 있습니다. 아무리 작다고 할지라도 바다를 건널 수 있도록 제작된 배라고 한다면 거기는 반드시 닻이 있습니다. 이토록 배마다 닻이 있듯이 사람마다 다 소망이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이 매일 일하고 사는 것은 이 소망이 있기에 그러합니다. 학생은 보다 나은 장래의 소망으로 공부합니다. 농부는 열매를 맺는 소망으로 농사를 짓습니다. 상인은 많은 이익을 남길 소망으로 상업을 경영합니다. 부모는 자식의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자녀를 기릅니다. 사실 모든 활동, 모든 사업의 배후에는 이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소망이 없으면 노력을 하지 아니합니다. 인내하지 않습니다. 희생하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소망이 없어지면 단 하루도 살지 못합니다. 자살이란 절망한 사람들이 최후로 취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소망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그래서 소망은 닻과 같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는 동안 소망이 있어야 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생에게 이 소망의 닻을 주기를 원하십니다. 소망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학생의 소망은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인격을 함양하고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농부의 소망은 곡식을 많이 얻는 것입니다. 산업가의 소망은 물건을 생산하는 데에 있습니다. 예술가의 소망은 보다 아름다운 예술을 창작하는 것일 겁니다. 과학자들의 소망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창조하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지위, 어떤 이들은 명예, 어떤 이들은 권세를 소망하고 노력합니다. 큰 소망, 작은 소망, 이런 소망, 저런 소망 가운데서 인생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소망은 이루어지기도 하고 수포로 돌아가 이루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소망이 이루어질 때는 삶의 희열을 느끼지만 소망이 좌절로 바뀌는 경우에는 절망의 한숨만이 남습니다. 여기에 인간생활의 한숨과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설혹 인간적인 모든 소망이 이루어져서 삶의 희열을 느낀다하더라도 우리가 본래 기대하던 것처럼 영원한 만족은 없습니다. 사업에 성공한 이들의 경험을 들어보면 그저 사업만 성공하고 돈만 모으면 천하를 얻을 것처럼 생각되지만 정작 사업에 성공해서 돈을 모아놓고 보면 기대하던 것처럼 만족은 없습니다. 오히려 돈이 많음으로 여러 가지 많은 문제가 닥칩니다. 시기하는 사람도 많고, 위협하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요새 웬만한 사람은 다 사진기 하나씩 가지고 있는 줄 압니다. 사진기 종류는 여러 가지이나 아마 이스트맨 코닥(Eastman Kodak) 이라고 하면 모를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카메라와 필름을 처음 제작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수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인생의 환멸을 느껴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의 소망은 바랄 때는 굉장한 것 같으나 결국 얻어놓고 보면 참 만족은 없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석사가 되고 박사가 되어야겠다고 공부를 합니다. 그러나 다 석사, 박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석사, 박사과정 중에 많은 사람들이 좌절을 맛봅니다. 더러 박사가 탄생됩니다. 그러나 박사가 된다 할지라도 정작 박사가 되고 보면 그것 역시 인생에게 영원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관청에 계신 분은 처음에 과장이 되어야겠다고 소망합니다. 그가 과장이 되면 욕심이 생겨 국장이 되고 싶습니다. 굉장히 소망을 두고 힘씁니다. 그러나 국장이 되고 보면 그거 뭐 별거 아닙니다. 오히려 진급이 되어 장관이 되면 화를 만나는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소망은 혹 성취했다 하더라도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만족은 찾지 못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공통된 경험입니다. 마치 바다 속에 들여다보이는 해초와 같습니다. 물 속으로 들여다 볼 때는 그 바다 물 속의 해초가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러나 정작 들어가서 해초를 움켜쥐어서 꺼내보면 그것은 별 것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성취한다고 하는 소망은 흔히 마지막에 환멸의 비애로 종막을 거두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 세상의 소망은 기쁨을 얻는다 해도 모두 순간입니다. 잠깐 뿐입니다. 세상의 소망은 쇠할 때가 있습니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지다가 떨어집니다. 마지막에 썩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에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덧 흰서리가 우리의 머리 위에 내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우리가 숨결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되면 백만장자이면 무엇 하며 박사이면 무엇 하며 대통령이면 무엇 합니까 세상의 소망을 성취해도 모두 안개처럼 잠간 있다가 사라져 없어집니다. 재로 화해 버리고 맙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소망은 영혼의 닻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보이는 소망이 아니니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찾아서 기다릴찌니라 우리들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이니라.” 시 62:5에 “대저 나의 소망은 하나님에게로 나는도다 오직 주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라고 했고, 시 71:5에는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또 골 1:27에서는 “이 비밀은 그리스도이니 곧 영광의 소망이시니라”, 고 했습니다. 즉 주님은 우리의 영광의 소망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 되십니다. 주님은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사랑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영혼의 닻으로 삼는 이는 어떠한 실패, 어떠한 타락, 어떠한 환난, 어떠한 슬픔이 있을지라도 요동치 아니합니다. 그 배가 밀려가지 아니합니다. 암초에 부딪치지 아니합니다. 파선하지 아니합니다. 세상에는 영혼의 닻이 없는 배를 가지고 이 풍파 높은 바다를 건너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래서 이 세파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다가 파선을 당하는 가련한 인생이 너무나 많습니다. 아무리 동해바다의 파도가 높다고 하지마는 금강산 일만이천봉과 같이 움직이지 아니하는 튼튼한 영혼의 반석을 의지하는, 영혼의 닻이 있는 사람은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절망하지 아니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절망이란 없습니다. 이 영원불멸의 영혼의 닻을 붙잡았습니까 내가 과연 이 닻을 붙잡았다고 하면 이 예배당 문 밖에 닻 없는 작은 배를 타고 노도광풍에 시달리는 가련한 내 동포들에게도 이 영혼의 닻을 전파하여야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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