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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제물과 교회의 기능 (히 1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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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본질은 사람을 자유롭게 그리고 온전하게 하나님 앞으로 가까이 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의 제사 제도로써는 이런 목적을 이룩하지 못했으며 오직 할 수 있었던 일은 먼 거리에서 가끔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것뿐이었습니다. 해마다 장막에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이것은 한없이 영원토록 되풀이 되었습니다. 만일 구약의 제사가 정말 효력이 있다면 되풀이해서 해마다 이렇게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을 것이며 단 한번의 제사로 충분할 것입니다. 그런데 해마다 되풀이해서 제사를 드림은 하나님에게 가깝게 가지 못한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이런 제사와 제물은 죄를 생각나게만 할 뿐 죄를 정결케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죄가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할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은 분명히 단번에 드린 만유의 죄를 속죄할 능력이 있는 제사입니다. 시 40:6-8에 “주께서 나의 죄를 통하여 들리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치 아니하신지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을 행하기를 즐기오니……”라고 했습니다. 시편의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은 동물의 제사를 원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단 한 가지 제사는 순종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의 귀한 것 또는 가치 있는 것을 하나님에게 드리는 헌신의 뜻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표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제물을 드리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용서를 얻기 위한 댓가로써의 제물만 드립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순종이 바로 참다운 희생의 제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삼상 15:22에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 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한 것이나 호 6:6에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시 51:16-17에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 하시리라”라고 하였고, 사 1:10-20에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숫 송아지와 어린양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너희가 손을 펼 때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찌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고 하였으며 미 6:6-8에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경배할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아니냐”고 했던 것입니다. 유일한 제물은 순종입니다. 순종만이 하나님께로 나가는 길을 제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완전하신 제물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따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드린 희생의 제물은 어떠한 인간도 드릴 수 없었던 완전한 순종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제물이며 참다운 제사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원한다면 순종만이 그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순종, 이것은 예수님께서 드린 제물입니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순종으로 바친 것입니다. 여기에 세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음과 같이 예수가 땅에 떨어져 죽으므로 거기서 새 생명체가 싹터서 자라난 것이 교회입니다. 예수가 피 흘리시며 돌아가신 골고다는 영원한 무덤인줄 알았으나 무덤이 열리고 예수가 다시 사시므로 교회라는 새싹이 움트기 시작하였고 예수가 승천하신 후에는 단비 같은 성령의 능력으로 교회가 자라서 거두고 또 거두어서 끊임없이 많은 열매를 맺게 된 것입니다. 이런 교회는 세 가지 책임이 있습니다. 교제, 봉사, 증거입니다.

1. 교회의 첫 기능(책임)은 교제에 있습니다. 교제는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요소입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여기에서 성도끼리 교제하는 곳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란 수직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요 수평적으로는 성도끼리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범죄 한 인간이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화목제물이 되게 하사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교제의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케 하여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관계를 수립하는 것을 그 첫째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선한봉사, 사랑을 해야겠지만 먼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일인 예배를 첫째로 하고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요,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또한 예배는 하나님과의 교제만 아니라 성도 사이의 교제가 있어서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는 한마음 한뜻으로 집에 있든지 성전에 있든지 기쁨으로 떡을 떼어 먹으며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사랑의 교제를 하였으니 영으로 거듭난 인간들이 사랑으로 친교를 맺은 사회가 교회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모신 곳에 교회가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교제의 정신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굉장한 헤롯의 성전보다 그리스도를 모신 나사로의 오막살이가 교회인 것입니다. 두 세 사람이 모인 적은 무리라도 사랑에 엉키어 주님을 사모하는 친교의 희열이 넘치는 모임이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는 외형이나 조직도 중요하나 친교가 본질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한 예배는 있으나 성도와 교제하는 친교는 없습니다. 바울은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으라고 했습니다. 오늘의 교회는 친교는 고사하고 서로 물고 찢고 싸우는 교회가 많습니다. 교회는 코이노니아의 책임과 기능을 다해야 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2. 교회의 둘째 기능(책임)은 봉사에 있습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고 섬기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심으로 교회가 세상에 있는 이유가 봉사의 책임을 다하는데 있음을 말했습니다. 봉사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봉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하라 하였으니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행동을 하나님께 봉헌하게 됩니다. 이런 봉헌 없이 우리 행위가 봉사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봉사에는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희생 없는 이기적 봉사는 모든 것을 불경건하게 만듭니다. 둘째는 이웃에 대한 봉사입니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인격을 접함과 동시에 사람들의 인격과 접하는 것이기에 우리들은 이웃이라고 하는 구체적인 인간에게 봉사하여야 합니다. 인간에 대한 봉사를 떠나서 하나님에 대한 봉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봉사해야 할 이유는 주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내가 선생이 되어 너희의 발을 씻기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 씻기시는 것이 옳으니라고 명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통해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부름 받은 것입니다. 교회의 기능과 책임인 봉사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들의 여러 가지 상태에 대한 동정과 재정적인 지원을 통해서 기독교적 사랑을 나타내는 봉사요, 둘째는 사람들을 영적인 친교로 인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적인 생활표준으로 살도록 힘쓰는 봉사요, 셋째는 정의가 실현되어 하나님 나라가 건설되도록 노력하는 봉사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상으로 볼 때에 이런 교회가 있는 곳에 의료사업, 교육사업, 사업 사업이 계속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입니다.

3. 교회의 셋째 기능(책임)은 말씀 증거에 있습니다 행 1:6에 “너희가 권능을 받으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이 교회의 기능이요 책임입니다. 교회는 정치단체나 학술단체나 친목단체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애국단체도 아닙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선교단체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은 교회의 선교적 책임을 잘 나타낸 말입니다. 베드로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 한 설교이고 바울의 간증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증거 한 것이며 스데반도, 야고보도 모두 예수를 증거 한 순교였습니다. 증거 한다는 말투리아라는 말은 피를 흘려 죽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십자가는 우리 죄를 사하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요 예수의 부활, 승천 역시 예수의 재림을 증거 한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요 전도자가 된다는 것은 순교를 각오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증거 했기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교회가 계속된 것입니다. 교회의 책임은 복음을 선포하는 일 뿐입니다. 종래의 교회는 고답적인 입장에서 사회의 불건전한 풍토를 비판만 하는 초연한 태도만을 취하였으나 지금은 그런 태도를 가지고서는 교회가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교회의 전도 일은 교회확장을 위한 일만은 아닙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일관성 있고 타당성 있게 전체로써 증거 하는 것입니다. 즉 계획과 뜻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모들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권력과 영광을 추구하기보다 고난 받기를 즐겨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기를 기뻐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일생을 가난한 사람과 병든 자를 고치시는 의사였습니다. 교회는 지금까지 건드리지 못했던 사회의 계층과 문화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는 보다 넓은 인간사회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업이 효율적으로 진행되도록 그 책임을 다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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