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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합당한 교회 (엡 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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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자기 자신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래서 대철인 소크라테스는 “네 자신을 알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은 자신을 잘 인식 못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인의 신분이 어떠한가를 생각해 보고 진정한 기독교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이야기해 봅시다.

1. 기독교인의 신분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존재입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선정 받아 부름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을 일컬어 성도, 혹은 하나님의 자니로 부르는 것입니다. 벧전 1:4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우리는 존귀한 신분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생활이 무엇입니까

2. 겸손한 교회생활 일본에 있는 동경국제대학의 총장이 어느 교회에 출석하는데 언제나 교회에 나오면 신발장 소제를 합니다. 교인들이 나라의 보배요 장관 이상이신 총장께서 신발장을 소제함은 체면이 안 된다고 말리면 그분은 “내가학교에서는 총장이지만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종입니다. 내 할 일은 하나님 나라에서 신발장을 소제하는 것입니다”라고 겸손한 교회생활을 보였습니다. 본문 말씀에 교회생활에 있어서 겸손의 필요성을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라고 권면했습니다. 겸손이 무엇입니까 겸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찬양하고 있지만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겸손의 덕이란 바실의 말처럼 “모든 덕 가운데 가장 보석 같은 덕”입니다. 또한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기독교에 있어서 미덕중 제일은 겸손이요, 둘째도 겸손이요, 셋째도 겸손이라”고 하면서 겸손의 덕을 강조했습니다. 약 4:6에는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의 합당한 생활은 곧 겸손한 생활입니다. 기독교인은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하고 사람 앞에서도 겸손하여야 하겠습니다. 구체적으로 겸손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1) 겸손은 자기 인식에서 오는 것입니다. 버나드는 말하기를 “겸손은 인간이 스스로의 진실한 자기 인식의 결과에서 자신의 무가치함을 깨닫는 덕”이라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을 깨닫게 됩니다.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은 겸손을 하나의 아첨이나 비굴한 것으로 봅니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데 초점이 있다는 점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항상 부각시키고 인생 무대에서 자기 자신만이 주역인 양 자기 자신을 내세우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끔 꿈꾸는 생활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꿈속에서 대통령도 되어 보고, 성직자도 되어보고, 농구선수도 되어봅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부족을 그대로 느끼며 정직한 생활을 사는 것입니다. (2) 겸손은 완전자 안에 사는 생입니다. 겸손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하심 속에서 그를 따라가는 인생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어떠한 처지에 있는가를 잘 압니다. 그래서 그는 완전자 안에 있지 아니하면 단 하루도 살수 없음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겸손한자는 그리스도를 떠나지 않고 오직 그 분을 향한 삶을 살아갑니다. (3) 겸손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활 변함없는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파라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을 가지지 않는 한 우리의 인생은 그 어느 것도 제대로 소유할 수도, 향유할 수도 없는 무의미한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자는 항상 하나님을 신앙합니다. (4) 겸손과 봉사로 맡은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직분을 맡게 되면 우리는 곧잘 교만하게 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직분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겸손해져야 합니다. 구약 성경에 사울왕은 처음에 얼마나 준수하고 훌륭한 인격자였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스라엘 초대 왕이 된 후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점 교만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폐하시고 그 후계자로 겸손한 다윗을 세운 것이 아닙니까 오늘날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겸손으로 주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벧전 5:5-6에는 “젊은 자들아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니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겸손한 봉사자로서 교회생활 해나가면서 교회의 본질적 사명을 더욱 보존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온유한 교회생활 온유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온유한 자에 대해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라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서리가 오면 군자는 반드시 그 서리를 밟아보고 처량한 마음을 일으킨다”고 온유의 성격을 논했습니다. 인생의 가을, 계절의 가을을 맞이하여 낙엽이 지고 청춘이 시드는 인생을 볼 때 허무한 인생을 알고 절대자 앞에 자신을 낮추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서에서 말하는 온유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1) 온유는 중용지도를 걷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철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하기를 온유는 프라오데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은 무골층(뼈가 없는 사람)이나 비굴한 사람을 표현하지 않고 또 과격한 분노자도 아니라 올바르고 적당한 때 분노할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필요에 따라 필요한 분노를 낸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오늘날에는 지나치게 이기적으로 입게 분노를 드러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필요 없는 분노를 낼 때가 있고 스승이 제자들에게 공연한 불만을 배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자들도 역시 자기감정이나 불만을 남에게 배출하는 것을 가끔 볼 때가 있는데 이런 것은 온유한 성품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에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중용지도를 지키면서 그런 온유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 교회의 본질을 찾아내어야 할 것입니다. (2) 온유한 자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자입니다. 플라톤은 말하기를 온유는 폭력과 잔인의 반대어라고 말했습니다. 온유는 훈련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인간은 동물을 길들입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우리는 난폭하고 욕심 많고 본능적 충동, 동물적 요소, 야만적 행위를 잘 훈련하여 온순하게 합니다. 그러면 누구에 의해 온순해 집니까 하나님의 지배 속에서 길들여 질 때 인간은 온유해질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울이 얼마나 포악한 자였습니까 그러나 다메섹에서 하나님에 의해 붙잡힌 후 그는 놀랍게 변화 받았습니다. 유명한전도자, 신학자, 목회자로서의 바울이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한국 교회사에서도 깡패가 변화 받아 김익주 목사가 되고, 선교사를 괴롭히던 이기풍이가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된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난폭하고 잔인한, 때로는 간음과 살인강도를 하던 자도 이처럼 하나님의 지배를 받게 되면 은유한 사람으로 변화하는 것을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도 많이 보게 됩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다스리지 않는 한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굴복시키지 않고는 다른 사람에게 봉사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을 조절하지 못한 채 다른 사람을 조절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내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온전케 하신사람은 은유하여 지고 땅을 기업으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겸손하시고 온유하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겸손하고 온유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결하고 품위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해 노력하고 다짐하는 제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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