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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바울의 생활관 (빌 01: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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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생존하기 위하여 생활하는 것이요, 생활하기 위하여 생존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루를 생존하는 데는 하루를 생존할 가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생존하니 생존하는 것도 아니요 생존하려고 생존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무슨 목표에 도달하려고 생존하는 것입니다. 즉 무슨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생존의 의의가 되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바울의 생활관을 통하여 알 것입니다.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생활한 사람은 다시 얼을 것입니다. 그의 생활 전부는 그리스도를 향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롬 14:8을 통해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다 주의 것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즉 바울의 생활 전부는 이 한 마디 말씀에 표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이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살아도 그리스도, 죽어도 그리스도, 괴로워도 그리스도, 즐거워도 그리스도뿐이었습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그리스도뿐이었습니다. 그러면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 란 무슨 뜻입니까

1.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삶입니다(롬 14:8) 이 말은 바울의 생활목표는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기독교의 개척 사도로서 실로 만대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제 사도행전과 바울의 서신을 읽어보면 그의 생황의 진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개척 사도인 바울은 그의 표면 생활이며 그의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생활은 그의 내면생활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혈통으로는 베냐민파요 히브리인 가운데 히브리인이었고 당시 가말리엘 문하에서 고등교육을 받아 율법에 정통한 자요 헬라문학에 능숙하였습니다. 저가 스스로 말한바와 같이 저는 바리새인의 아들이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이 되기 위하여 자기의 정력을 다하여 수양을 쌓던 사람입니다. 갈 1:14에서 그는 유대교를 열심히 믿어 연세가 같은 동료보다 뛰어나게 조상의 유적을 더욱 열심으로 지켰고 그는 진실로 거짓 없이, 하나님을 대하든지 사람을 대하든지 흠 없는 양심을 가지고 지내었고 의로는 책망할 것이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메섹은 그의 일생에 잊을 수 없는 일대 전기를 일으킨 곳입니다. 그는 원래 기독교의 극렬한 반대자로서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 신자를 핍박할 때에 항상 가편투표를 가지고 반기독교 운동에 선봉이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기독교인을 열심으로 핍박하기 위해 대제사장의 공문을 얻어서 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다메섹에 가까이 갈 때에 홀연히 공중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와 주님 앞에 결국 엎드려졌습니다. 반기독교의 괴수가 불과 몇 시간 만에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바로 증거 하게 됨은 실로 놀랄만한 근 변화입니다. 저의 회개는 돌변적이요 저의 신앙은 순간적이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은실로 바울의 굳은 마음을 깨뜨리는 폭발탄이었습니다. 이 폭발탄에 맞은 사람은 회개치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 다메섹에서의 경험으로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럴 때에 바울에게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흘러나왔던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입니다 바울은 실로 장구한 세월에 신앙의 경주를 하였으며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어서 고난을 받으심과 같이 저는 주님을 위하여 고난을 여러 형태로 받았습니다(고후 11:23-27). 오늘 주님의 복음이 끝까지 전파되어 방방곡곡에 교회가 없는 곳이 없으며 복음을 듣지 못한 곳이 없습니다. 이것은 과연 선배들이 피와 땀으로 개척한 결과입니다. 나폴레옹은 “불가능이한 단어는 어리석은 자의 사전에나 있지 내 사전에는 없다”고 했으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그의 종말은 실패했습니다. 세상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은 이와 같이 헛됩니다. 이제 바울의 일을 생각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그의 최후는 영광의 최후이며 승리의 최후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딤후 4:7-8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 후로는 나를 위해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니”라고 바울이 개선가를 부르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로마 감옥외 단두대 위에 그 목숨이 아침이슬같이 쓰러지는 순간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습니다. 저의 앞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는 그에게 없었고 다만 죽음의 건너편 언덕의 영광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죽음이후의 세계를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지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영원한 집이 있어서 그 집에 가서 살 소망을 지녔던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의 삶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삶의 세계는 영원입니다. 이 세상 삶은 환난의 삶이요 그 세계는 영원한 영광의 세계임을 성경은 밝혀주고 있습니다(고후 4:16-5:10).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연 자기 생활의 근본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 이었습니다.

3.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입니다(갈 6:17) 이 말은 그리스도가 사도 바울의 생활의 법칙이라는 말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실로 그리스도를 생활의 법칙으로 삼았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i고 했습니다. 실로 예수님의 생애는 적막하였습니다. 실로 주님께서는 몸을 의탁할 곳이 없어서 어떤 때는 들에서 지내며 어떤 때는 산에서 지내시며 실로 바람과 이슬에 귀하신 몸을 던졌습니다. 바울의 생애 역시 주님의 생애를 닳는 삶이었습니다. 저가 천국을 향하여 가는 길은 결단코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저의 앞에는 고난과 위험이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겁내지 않고 최후 결승지대까지 나아갔습니다. 그가 일평생 승자치 생을 걷게 된 배경은 그의 신앙이었습니다. 바울의 생애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뿐이었습니다. 고전 2:2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위를 쳐다 보나 아래로 내려 보나 좌편을 보나 우편을 보나 모두 다 그리스도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처럼 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삶을 가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야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처럼 살아가야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갈 때 바울처럼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표현하여 죽도록 충성하시는 여러분들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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