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요 한 (막 03:17)

첨부 1


제 4복음서에서 보면 ‘예수께서 사랑하신 제자’로 알려져 있는 요한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요한이라 생각하면 그른 사랑스런 성품을 가졌다고 추측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가룟 유다만을 나쁘게 혹독하게 판단하는 예가 있습니다만 눅 9:55-56에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꾸짖어 말씀하셨습니다. 즉 “제자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이를 보고 가로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예수께서 꾸짖으시며 너희는 무슨 정신으로 말하느냐 인자의 온 것은 생명을 멸하러 온 것이 아니요 구하러 왔노라”하시고 함께 다른 촌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번은 사마리아를 지나가실 때 우물가에 한 죄 많은 여인과 더불어 ‘생명의 물’에 대하여 말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때 여자뿐 아니라 그 마을에서 온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를 영접한 바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로부터 구원의 희소식을 들어 감격하여 그들과 함께 머물러 줄 것을 구하매 예수님께서 이틀을 거기서 체류한 때도 있습니다. 예수는 종종 멸시받는 사마리아인을 중심인물로 세워 비유하실 때가 계십니다. 열 문둥이가 있는데 모두 고침 받았으나 그 중 예수께 돌아와 감사한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눅 10장에 보면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강도 만나 자에게 선을 베푼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주무실 곳이 필요해서 두 제자를 앞서 준비하게 하기 위해 촌에 보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인종상, 종교상의 차이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제자가 돌아와 보고하기를 예수님의 일행을 영접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이 말을 들은 요한은 참을 수가 없어서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서 내려와 저들을 멸하라 명하리이까” 그래서인지 막 3:17 본문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에게는 ‘보아너게’(Boanerges)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해 주었습니다. 성격이 급하고 거친 것 같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알고 만나기 전까지는 자기의 성격에 대해 그다지 심각하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성격에서 오는 죄를 육적인 죄보다 더 엄격히 말한 바 있습니다. 어떤 분이 목사님께 찾아와 ‘나는 성격이 단순한 편입니다. 그래서 이따금 폭발하기는 하지만 곧 회복된다’고 말하자 이에 대하여 목사님이 대답하기를 ‘기관총도 그렇게 하지요. 그러나 모든 것을 다 조각조각 되도록 쏘아 구멍을 내 버리지요’하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이른 아침 일찍이 통근을 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실수하여 젊은 사람을 좀 밀었는데 젊은 사람은 노인이 사과할 겨를도 주지 않고 욕을 하고 뒤로 가버렸다고 합니다. 약 30분 후에 이 젊은이는 취직하려고 신청서를 낸 회사의 사장실에 면접하러 들어갔더니 그 사장이 바로 조금 전 버스 주차장에서의 그 노인이었습니다. 여러 서류를 보더니 사장이 하는 말이 ‘추천서는 다 좋은데 오늘 아침 버스 주차장에서 보인 그 자중할 줄 모르는 성격을 볼 때 이 추천서는 아무 뜻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성격이 큰일을 결정할 때가 있습니다. 심리학자는 말하기를 노환이라는 것은 우리의 인격과 건강, 행복을 파괴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一笑一少, 一怒一老라는 말은 참으로 적절한 말이라고 봅니다. 이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른 여러 가지 사건들이 많지만 이 나쁜 성격과 고약한 성질 자체보다 더 이상 그 사회를 파괴하는 것은 없다고 봅니다. 성낸다는 것은 기독교적인 정의감에 대한 분노도 있지만 그 분노 자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무리를 보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며 장사치들을 내쫓으시며 노하셨지만 하나님의 거룩성을 위한 것이지 주님은 어디까지나 오른쪽 뺨을 때리면 왼쪽 뺨을 내미는 자입니다. 어떤 분은 분노함은 예수님의 가슴에 못 박는 죄라고 하여 예수님의 사진을 벽에 걸고 노할 때마다 그 사진에다 가시를 꽂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님의 초상화 전체가 가시로 덮여졌다고 합니다. 여러 교우들이여! 성내기 쉬운 성격을 이기는 비결을 배웁시다. 요한도 처음 예수님과 사귈 때는 우뢰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격을 이기는 비결을 배우지 아니하였더라면 오늘날 사랑의 사도로서 세상에 널리 알려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베푸시기 직전 요한과 야고보는 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 좌우 자리를 달라고 하였던 욕심장이였습니다. 가룟 유다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천국에 대해 자주 논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가 바라는 천국은 이 세상에서 잘 살 수 있는 것이 천국이며 영광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요한도 역시 이 세상의 욕망, 세상적인 소망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욕심 많은 요한, 야고보 등의 제자를 대하실 때 인내로써 대하신 것입니다. 주님의 대답은 막 10:43-45에 보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몇 일 후 요한은 주님의 이 말씀이 더욱 더 그 가슴에 새겨지는 귀한 말씀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그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주님은 사랑하는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했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요한아 보라 네 어머니이니라” 예수님은 요한을 신뢰했습니다. 세상의 욕심, 허물, 비겁, 욕구를 모두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요한의 포부와 희망을 제거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욕망을 변천시키셨습니다. 요한복음은 독수리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의 힘찬 성격이 독수리의 날개처럼 힘차게 주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한은 변화를 받았습니다. 변화된 요한은 자기 자신의 어떤 위대한 힘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변화시킬 수 있는 권능은 다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었고 모든 것이 그에게서 온 것임을 알았습니다. 변화산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가 바로 요한이었습니다. 또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기도한 세 제자 중 하나가 요한이었습니다. 마지막 성찬식에 예수님의 품에 기대었던 분은 요한이었습니다. 그러나 수치스럽게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밤에 요한은 제일 먼저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십자가상의 주님 곁에서 주님을 따르고 은혜 안에 생활하여 그 인격과 성격이 완전히 변화한 것입니다. 요 15장에 “내가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될 때 과연 우리들도 요한과 같이 참다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