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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가지 멸망에 대한 통곡 (애 0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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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레미야 애가는 세 가지 망함에 대 하여 통곡한 글입니다.

1. 나라의 망함을 보고 통곡했습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때부터 시드기야 왕까지 40여년, 망하는 조국과 운명을 같이 한 대예언자입니다. 소장 명군 요시야가 불행히도 무깃도에서 전사한 후 민족국가의 운명은 날로 기울어졌습니다. 요시야 전사한 후 민족국가의 운명은 날로 기울어졌습니다. 요시야 전사 후 3-4년간 애굽의 침략하에 피폐한 뒤에 또 강포한 바벨론 침략군이 쳐들어오니 다윗 왕 국은 여지없이 파멸되고 말았습니다. 렘애 1:4에 “시온의 도로가 처량함 여 절기에 나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렘애 2:6에 “성막을 동산의 초막 같이 헐어 버리시며.” 렘애 5:2에 “우리 기업이 외인에게 우리 집들도 외인에게 돌아갔나이다.” 이렇게 통곡한 것은 조국이 망하고 황폐한 것을 보고 우는 것이니 이는 국가의 멸망을 보고 통곡한 것입니다. 북조 왕국은 독한 앗수르에게 여지없이 파멸되었고 이제 남은 왕국은 엎어진 처녀와 같이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허락받은 복지, 여호수아가 피로 점령한 가나안 사사들이 피로 지켜온 기업을 원수에게 준 단 말입니까 이에 애국자들의 눈물이 폐허에 떨어지도다. 유대는 우리나라의 강원도 정도의 적은 나라이지만 천하제일의 지역입니다. 북방에 우뚝 솟은 헬몬산(9천척)이며 “백두산은 8천 척” 사시 백설 장백산이요, 남으로 떨어진 브엘세바는 사시장청 봄동산입니다. 갈멜산 포도원에 술이 흐르고 샤론의 장미꽃이 향기를 놓도다. 3,200종의 식물이 울창한 그 숲속에 118종의 짐승들이 뛰놉니다. 광풍명실 갈릴리 호수에 43종의 고기가 헤엄치고 팔레스틴 밝은 하늘에 348종의 새들이 춤춥니다. 이렇듯 아름다운 복지 아브라함 이래 2천년 이상향 다윗의 창업 500년 왕국이 일조에 망한단 말입니까 아이고! 아이고! 통곡의 예언자의 눈물이 폐허에 떨어집니다. 한국의 근대사 역사를 우리는 볼 때 예레미야 애가를 읊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제시대에는 3천리 금수강산 전답 옥답 7-8할은 일본인에게 값 싸게 다 팔아버렸고 태백산, 소백산 우거진 산림은 남의 것이 되고 연산 75톤의 황금은 외국인이 파가고 한국 사람은 거러지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아이고! 아이고! 나라 빼앗긴 백성 설움을 통곡하도다, 그러다가 36년만에 일제 손에서 광복한 이 강토이지만

3.8선은 웬일이며 백만 용사의 피 위에서 통일없는 휴전은 이 무슨 화입니까 3천리 금수강산 처량하도다 이북 내 강토는 언제 자유 진영 민주주의 찾아오게 되었으며 황폐한 이 강토 언제 통일을 가져올꼬. 아이고! 아이고! 나라 위해 통곡하노라.

2. 민족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고 전멸당하니 통곡합니다 렘애 4:7-10에 “전에 존귀한 자가‥‥‥ 이제는 그 얼굴에 숯보다 검고 그 가죽이 뼈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거리에서 알 사람이 없도다! 칼에 죽은 자가 주려 죽은 자보다 나음은 토지소산이 끊어지므로 이들이 찔림 같이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처녀 내 백성의 멸망할 때에 자비한 부녀가 손으로 자기 자녀를 삶아 식물을 삶았도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비절참절한 일입니까 장정은 전장에서 쓰러지고 포로된 자는 종으로 팔리어 갑니다. 노약은 굶어 죽고 병들어 쓰러지고 어미가 아이를 삶아먹는 무서운 날입니다. 왕하 25:7에 “시드기야의 아들들을 저의 목전에서 죽이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사슬로 절박하며 바벨론으로 갔더라”고 했습니다. 다른 백성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의 피는 칼에 흐르고 기근과 병으로 말라버리는 것이니 이는 민족의 피가 망하는 통곡입니다. 라헬의 백골도 베들레헴 무덤 속에서 애곡하도다(렘 31:5).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야곱의 가족 75인이 애굽에서 400년 걸려서 200만 명의 민족이 형성되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 전능으로 바로의 멍에 아래서 구출하여 광야에서 훈련하고 그 크신 사랑으로 복지에서 양육하여 2천년 기르신 선민이 멸망하는 것은 하나님도 슬퍼하시겠거늘 예레미야 어찌 통곡하지 않으리요. 아이고! 아이고! 민족의 멸망을 방송대곡함이로다. 우리는 일제시대를 다시 회고해 봅니다. 옥토에 농사지어 기름진 쌀은 일본인이 먹고 만주 좁쌀 그것도 배고프니 마음대로 먹을 수도 없고 배불리 먹지 못해서 우리 동토 농민들 그 얼굴은 핏기가 없습니다. 살찐놈, 붉은 얼굴로 뛰노는 아이는 일본아이요, 한국 학생은 모두 영양실조입니다. 한국 동포의 90%는 기생충에 시달려 피를 빨리우고 청년의 반은 타락, 방종으로, 성병으로 썩고 있었으니 한 백성의 피는 마르고 말랐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나라없는 백성을 바라보니 예레미야 애가가 읊어집니다. 해방되었으나 국토는 38선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다시 동족상전 6.25가 터졌으니 3년간 전쟁으로 시체로 산을 이루고 피로 강을 이루었으니 동족 민족끼리 찢고, 물고, 싸우고, 죽이니 아이고! 아이고! 통곡하노라. 100만 장정이 쓰러졌고 다시 휴전선으로 그어졌으니, 반만년간 길러온 한 민족인데 남의 사냥터가 되게 하다니 하나님도 슬퍼하시겠거늘 내 어찌 곡하지 않으랴. 한국 백성들아 베옷을 입으라. 예레미야와 같이 통곡하고자 하노라.

3. 심령의 죽음을 보고 통곡하노라 예레미야는 나라의 망함과 동족의 파멸의 원인을 기록하되 렘애 5:7에 “우리 열조는 범죄하고 없어졌고 우리는 그 죄악을 담당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양심이 무너진 죄악을 경고하여 마음의 파상을 통곡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므낫세 왕 반세기동안 부패한 나라에서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에 큰 기대를 가졌으나 정치에 의한 종교운동은 외부의 개선은 있으나 내적효과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심령의 종교를 외쳤습니다. 성전은 무너지고 나라는 망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하시니(렘 23:24), 천하 어디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리요, 망국의 날에 마음의 성전, 무소 부지하신 하나님의 도를 가르쳤습니다. 마음의 종교를 주장하는 저의 안광(眼光)에는 이스라엘 사람의 썩어진 정신계를 차마 볼 수 없었습니다. 렘 17:9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계를 보라. 렘 1:16에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며”, 교회의 지도자들을 보라. 렘 5:31에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렘 7:11에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고 했습니다. 갈대아 군대는 하나님의 성전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유대인 강도의 굴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저희들은 성전에서 우상을 섬겼으니 하나님이 버리신 것입니다. 예언자는 뼈가 흔들리도록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대한 예수교 장로회만 보더라도 총회가 3분5열, 남북 청년 행동 대원까지 조직하여 총회 석상을 어지럽혔으니 남북통일의 기도가 끊어집니다. 렘 7:16에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너를 듣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남북통일의 기도조차 끊어지니 내 어이 살리요. 아이고! 아이고! 교단분리 교회가 깨여지리니 판문점 회담으로 휴전은 이루어지고 남북이 또 분단되니 어이할꼬! 렘 9:3에 “이 백성을 보라 악에서 악을 진행하며”, 렘 5:7-8에 “저 무리를 보라 그들의 행음하며 창기의 집에 허다히 모이며 그들은 살지고 두루 다니는 소 말 같이 각기 이웃의 아내를 따라 부르짖는도다”라고 했습니다. 렘 20:12에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는 너희를 보시느니라. 렘 6:13에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람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오늘 말로 하면 상점 아이로부터 고관 국회의원까지 다 빈한한 자 되며 부흥사로부터 목사까지 다 궤휼을 행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렘 8:6에 “그 악을 뉘우쳐서 나의 행한 것이 무엇 인고 말한 자”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생사흥패의 역사적 순간에서 데모행진을 볼 수 있으나 누가 회개하였습니까 산더미 같이 쌓은 죄악 회개하지 아니하는 유다는 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아주 썩어지기 전에 바벨론 채찍 아래 서두에 회개시키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바벨론 치하에 회개하기를 권하여 우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예레미야의 예언과 같이 포로생활 70년에 회개하고 고레스의 해방을 얻어 돌아왔습니다. 오늘 우리도 징계의 채찍 아래에서 개인의 죄와 교회적 죄악과 민족적 죄악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상한 우리를 회복하여 주실 것입니다. 렘 31:3에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 오 하나님 무궁한 당신의 사랑으로 이 백성을 살려 주시옵소서. 렘 31:34에 “내가 그들의 죄악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십자가에 달린 예수여 우리를 한 번 더 용서하시고 나의 죄를 기억지 마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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