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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화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눅 11: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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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로되 사람들의 직업에 따라 그 모양이 각각 다르게 나타납니다. 바리새인의 죄는 외식하는 죄였습니다. 사람들은 외식으로써 자기의 허물을 가리우고 의로운 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란 결국 자기의 원래 모습대로 이 세상에 나타내어지고 자기의 허물이 있는 것만큼 그 허물이 나타내어지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죄를 가리우는데 선수였고 자기가 의로운 체 함에 능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는 온 세상 사람 앞에 저주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증거하고 계시는데 한 바리새인이 찾아와서 자기와 함께 점심을 하시면 좋겠다고 초대를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따라 집에 들어가 식탁에 앉게 되었습니다. 보통 누구를 식사에 초대하는 것은 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뜻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바리새인은 주님을 사랑하고 존경해서 점심에 초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벌써 그들의 마음을 뚫어보고 계셨습니다. 사람을 속일 수는 있어도 주님 앞에는 숨겨질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저희를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십니다. 시 139:1-4에 이 사실을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고 표현했습니다. 바리새인은 주님께서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함을 보고 놀랐습니다. 이것은 정결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법상의 문제였습니다. 율법에는 사람이 식사하기 전에 일정한 방법에 따라 자기 손을 씻어야하며, 각 식사과정 사이마다 손을 씻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가정마다 손을 씻기 위한 큰 돌로 만든 물항아리가 있었습니다. 그곳에 손을 씻고 난 후 식사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에게는 이 의식이 굉장히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이 의식을 저버리는 것은 바리새인에게 있어서 큰 죄를 짓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손씻는 일에 지극히 엄격한 만큼 마음을 정결케 하는 일에도 그와 같이 특별한 관심을 가지기를 원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분명히 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이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자신을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혹시 우리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겉으로는 거룩한 무리처럼 살지만 속마음의 상태가 부패해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회칠한 무덤보다 더 나을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마음이 청결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은 마음은 지옥처럼 어두우면서도 겉은 천국처럼 밝게 사는 것처럼 나타내려 하였습니다. 속에는 독사의 독을 품고 있으면서도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생활을 하는 척 하였습니다. 의식의 근본 정신을 잃어버리고 외식하게 된 것입니다. 마가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사람의 병을 고치나 안 고치나 엿보다가 주님께서 손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비난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킬줄은 알았으나 안식일의 근본 정신을 잃어버리고 사랑이 없이 형식에만 치우쳤던 것입니다. 그러면 바리새인의 외식은 무엇이겠습니까

1. 겉만 깨끗하게 하는 외식 그들은 밥먹기 전에 손씻는 규례는 지키면서 그들의 내부에 있는 탐욕과 악독의 죄는 청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순종하려는 마음보다도 세간에 퍼진 사람들의 풍속에 맞추어 인심이나 잃지 아니하려고 하였습니다. 사람 앞에서보다 하나님 앞에서, 외부에서보다 내부의 정결이 있어야 할 진정한 경건에 대해서 그들은 무관심했습니다. 기독교 신자라면 누가 있을 때만 정결한 것이 아니라 무의식 중에서도 기독신자여야 합니다.

2. 작은 것은 지키면서 큰 것은 버리는 외식 바리새인은 십일조를 바쳤으나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예배는 아무리 성대할지라도 생명없는 몸과 같습니다. 몸이 필요하고 귀하지만 생명이 없으면 썰기 마련이고 냄새나기 마련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나 움직이는 뜨거운 심령이 없이 다만 종교적 행위의 외각으로만 만족하면 그것은 이미 죽은 신앙입니다. 42절에 “화 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율법대로 처음 난 열매를 드리는 것을 잊지 아니하였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그들은 가장 큰 제사의식으로 생각했습니다. 정말 큰 예배제사 절차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께서는 좋지만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도 같이 행하여야 더 좋아합니다. (1) 그들은 땅에서 난 첫 열매 중 일곱 가지의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바치었습니다.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올리브, 꿀이 그것입니다. 이것들의 처음의 것을 성전에 바쳤습니다. (2) 테루마(Terumah)라고 하는 처음 익은 곡식 외에 제사장의 생계를 위해서 전수확량의 50분의 1을 성전에 바치었습니다. (3) 십일조를 바쳤습니다. 이 십일조는 제사장과 레위인에게 드려진 제물로 특별히 십일조를 내는 가정은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고 믿었습니다(말 3:9-10). 그들은 이 예물들을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찬 의무가 끝나는 것으로 알았으나 주님께서는 제물과 함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드리라고 하시었습니다.

3. 대접을 받으려고 자기를 꾸미는 외식 마 23:5-6에 보면 그들은 옷을 입는데도 어떤 방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의로운 체 외형의 태도를 의복으로 나타내려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남에게 대접받으려고 그들의 옷 모양을 꾸몄습니다. 그러나 그들 속에는 죄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형만 형식을 갖추면 종교의 모든 것은 만족하게 유지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애심, 공의심까지도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순서에 의한 봉사만 하면 되는 것으로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빠짐없이 출석합니다. 성경공부 시간에 참여하고 봉사를 합니다.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다 되는 줄 알면 교만하기 쉽고, 그렇지 못한 자를 멸시하는 마음을 가져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사랑과 자비를 따지고 대하지 못한다면 엄격한 의미에서 바리새인과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들은 사소한 일로 인하여 기독교인의 본질적인 의미를 상실하지 아니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에게는 사랑과 친절과 공의와 아량이 먼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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