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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람산의 고독 (막 14:3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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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으시면서 예루살렘 성에 왕으로 입성하신 예수님께서는 몇 날 동안 원수들에게 많이 시달리기시도 하시고, 또 가장 많은 교육과 책망도 하셨습니다. 그러는 동안 원수들은 예수를 죽일 치밀한 음모와 계획을 진행시켰고, 이에 예수님은 인류를 위하여 속죄의 죽음을 죽으실 각오를 준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잡혀가시기 전날 아직도 겸비의 덕을 모르고 서로 높다고 다투는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만찬이 끝나고 찬미를 부른 후에 제자들을 데리시고 늘 기도하시던 감람산에 오르셨습니다. 밤은 깊었습니다. 이 밤이야말로 예수님에게 참으로 비통한 밤이었습니다. 3년간 따라다닌 가룟 유다는 돈의 유혹을 받아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는 이제 예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원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버리고 남은 열 한 제자를 데리시고 감람산을 오르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정말 고독했습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 와서 여덟 제자를 기다리게 하시고 그 중에 가깝게 지내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시고 산으로 오르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죽을 지경으로 고독했고 고민으로 차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 제자와 늘 가시던 그 장소에 가시어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있으라”고 그 마음을 표시한 후 조금 더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리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감람산의 예수님의 고민을 알아야 합니다. 이 예수님의 고민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죽음의 두려움 때문도 아닙니다.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던 예수님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많은 결실을 가져올 것을 말씀하신 주님입니다. 예수님의 고민은 사랑과 공의의 충돌 때문이었습니다. 인류의 죄를 묵인하자니 그의 공의가 허락질 않고 인류의 죄를 심판하자니 그의 사랑이 용납지 않아 어떻게 해야 할 지 결정짓지 못해 그 최후의 결정에서 그는 고민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과 인류의 중보자로서, 화해자로서 고민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여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그러나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예수님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습니다. 화해자로서 고역을 다하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독일 작가 카프카의 글 중에 변신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내용은 판매원으로 밥벌이를 하던 그레고리라는 청년에 관한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잠을 깨어 보니 자기의 몸 전체가 무수한 다리를 가진 한 마리의 큰 지네 벌거지로 변해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물론 출근을 할 수 없었습니다. 찾아 온 직장 사장은 그레고리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쳐 버리고 어머니는 졸도하고 말았으며 아버지는 방으로 몰아넣어 방문을 잠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가족을 위해 일하며 희생해 오던 그레고리, 그러나 하루아침에 그는 집안에서 혐오와 저주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그의 등에 상처를 입혔고 여러 가지로 고통을 겪었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독과 열등의식은 자신을 저주하는 일로 변했습니다. 그는 감금된 채 동생이 갖다 주는 식사만을 받아먹는 것이 생의 전부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싸늘한 시체로 변했습니다. 그 누구도 울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은 오랜만에 밝은 기분으로 산책을 떠나기까지 합니다. 카프카가 폭로하는 오늘의 인간! 여러분과 나! 인간은 갈색으로 변하는 그레고리입니다. 무한한 고독, 인간은 고독 속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고독한 인생은 산다는 그 자체가 고통스러운 삶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주변에 둘러 있음에도 나는 그 속에서 갑자기 “나 홀로” 있다는 궁극적인 고독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내 존재에 대한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우리는 또한 깊은 고독을 경험하게 마련입니다. 죽음의 고독도 뼈저리게 느낍니다. 고독은 죽음 앞에서 버림받고 있다는 절규에서 옵니다. 친구로부터 버림받고 나가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느껴졌을 때 광야에 홀로 던져진 고독입니다. 예수의 삶은 고독 자체였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의 고독! 그것은 모든 인간의 고독 중에 가장 비참한 순간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에게 고독을 느낄 수 있는 능력만 주신 것이 아니라 고독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능력을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고독을 해결키 위해서 자연과의 대화를 들고 나섰습니다. 등산붐, 시, 음악, 그림, 사색을 통해 시도해 봅니다. 그러나 삶의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고독을 궁극에서 해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음악도 듣고 그림도 보는 동안 또 다른 고독으로 옮겨집니다. 우리는 고독을 극복하기 위해서 고독하지 않은 양 어울려 살고자 합니다. 친구와 어울리고 직장인과 어울리고 식구들과 어울리고 애인과 어울리고 술꾼과 어울립니다. 대중 속에 어울렸기에 우리는 고독을 해결한 것처럼 생각하고 기뻐합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오는 발길 속에는 존재의 깊은 곳에 고독은 그대로 있음을 발견합니다. 이 고독을 궁극적으로 해결하신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는 인간의 고뇌, 고독을 포기했습니다. 기도의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거룩한 고독, 그것은 기도하는 순간입니다. 하나님 뜻 앞에 말없이 나의 영혼을 내어놓는 바로 그 순간! 비로소 그 순간에 나의 모든 고독은 새로운 해결을 얻습니다. 바로 이 순간 나의 삶의 중심은 하나님의 중심과 만나게 됩니다. 영원과 만나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은 고독합니다. 그러나 이 고독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내 이웃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져 가는 새 용기를 부여받는 거룩한 고독입니다. 해결의 길은 고독의 도피나 카프카가 말하는 죽음으로 해결 못합니다. 해결의 길은 단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과 뜻 앞에 우리의 영혼을 내어놓는 거룩한 고독! 기도하는 순간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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