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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는 세상의 빛이라 (요 08: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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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초막절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멀리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이삭 및 야곱의 하나님인 여호와에게 그들의 경건심을 표시하기 위하여 모여들었습니다. 두 개의 강한 등잔불이 성전 앞마당 뿐 아니라 캄캄하고 거무스름한 거리를 비치고 있습니다. 초막절은 이 백성들이 광야에서 반석의 물을 먹었던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실로암 못에서 물을 떠와서 성전 뜰에 뿌리는 행사가 있습니다. 주님은 요 7:37에서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마시라 그리하면 너희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흐르리라”고 설교하신 다음 이제는 초막절의 마지막 행사로 출애굽 후 광야 사십년 간에 불기둥으로 이 백성을 인도하신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성전 안 뜰에 큰 등불을 켜 놓습니다. 예수는 이것을 보시면서 빛에 대하여 설교를 하셨습니다. 주님은 “나는 빛이다”라고 하시면서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스스로 밝혔습니다. 예수는 그의 권위있는 설교의 형식 “나는 ……이다”의 형식으로 자신이 빛이신 것을 선언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본성적으로 “사람들의 빛”(요 1:4)이시고 “세상에 내려오신 빛”(요 8:12)이시라는 사실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는 초막절 행사가 끝날 무렵 성전의 불을 바라보시면서 “너희들이 보고 있는 이 빛은 그 범위가 제한되어 있고 그 화력도 없어지지만 내가 너희에게 비취는 빛은 전 세계적이며 영원한 것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곧 군중들의 강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예수는 곧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람된 자로 지목되었습니다. 그러면 이천여년 지난 오늘에 있어서도 우리는 주님의 주장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을 참되게 진정으로 받을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실제 생활을 통하여 입증될 수 있는 것입니까 이천년 지난 동안 예수의 주장하신 말씀의 가치를 평가, 시험해 볼 많은 기회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목할만한 사실은 초막절 당시는 배척하였으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으면 안되게끔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주님의 주장이 적어도 세 가지 입장에서 참된 진리였음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1. 주님의 설교는 진실이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설교와 가르침은 과연 어떤 사상의 체계보다 더욱 크게 그 위력 과 영향력을 발휘하였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무리 훌륭하고 광대한 사상의 교훈을 가졌다 하더라도 예수의 그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습니다. 로마의 식민지였던 유대 나라의 저 시골 나사렛 출신 목수 예수는 이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으며, 여러 가지 난관과 실망 속에 빠져 있는 때도 이 새 소망의 빛으로서 난관을 뚫고 나가게끔 인도해 주고 있습니다. 저 유대 시골에서 농부와 어부를 상대하여 가르치신 말씀은 동서의 공간과 고금의 시간과 인증을 초월하여 20세기 인류에게 빛을 던져주고 있는 빛의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가 가르치신 산상보훈은 참으로 수정과 같은 말씀으로 인류를 구하는 위대한 교훈이요 진리의 말씀입니다.

2. 주님의 실생활이 진실된 빛됨을 증명합니다 영국의 역사 철학가 렉키(Lecky, William Edward Hartpole1838-1903) 는 그의 저서「History of European moralsⅡ」에서 주장하기를 “예수 의 짧은 삼년간의 공생애는 인류의 모든 도덕가들의 권유나 모든 철학자들의 논설로 인류를 감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문화권에도 큰 영향을 준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 는 세계의 위대한 음악 창작에 큰 영감을 주었으며, 고전 예술의 극치를 이루게 한 위대한 화가들을 감응시켜 왔습니다. 또한 무궁무진한 시의 보고도 예수를 빛 아래서 나타냈으며, 모든 위대한 문학 대걸작품은 대다수 가 예수의 감화를 받았다는 것이 숨길 수 없는 사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의 영향력은 사회 개혁의 영역에도 불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노예제도 폐지, 적십자 활동, 노동업 개량, 대중을 위한 교육시절 완비, 그리고 현대와 인도주의 특징을 표시해 주는 드높은 사회적 도의심은 예수의 “지극히 미천한 자도 내 형제 자매”라는 정신을 따라 그리스도의 자비심의 발자취를 따름에서 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세상의 빛이 과거에 떠오른 것처럼 그리스도의 윤리와 구속이 그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다만 물질세계에 밝음을 주는 정도의 계시자만이 아니라 영계의 깊은 어둠을 깨뜨리시고 밝혀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죄악의 깊은 어두운 세계에 빠진 영혼을 구하셨다는 것입니다. 그의 십자가의 구원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적으로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3.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에게 임재하심 브라운(John Brorm 1800-1859 미국 노예폐지 운동가)이 처형편 이 후 도로 헨리(Henry David Thoreau 1817-1862 미국의 사상가, 수필가)는 브라운에 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골목에서 언제나 그를 만납니다. 흑인가 골목에서 그는 생존시 때보다도 더욱 활기있게 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오늘날 이 땅에서 이천년 전에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고속도로에서도, 비행기 속에서도, 기선에서도, 빈민가에서도, 공장에서도, 병원에서도, 시장에서도, 대학 캠퍼스 속에서도, 그리고 각 인간의 마음속에서 언제나 주님께서는 우리와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중에서도 그리스도를 만나고, 우리의 이해 판단 속에서도 그를 만납니다. 우리는 결코 그리스도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마 28:20에 “보라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신 대로 그리스도는 우리 생의 체험을 통하여 실지로 영원히 살아계신 것입니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임재로 말미암아 그들의 천성을 바꾸어 왔습니다. 다소 출신 사울은 잔인무도하게 기독교를 박해하고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임재함을 만나 세계의 가장 유명한 전도자 바울이 되었습니다. 초대 교부 어거스틴은 방종하고 음탕한 청년기를 보냈으나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통하여 기독교 성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미국의 부흥사이자 교육가인 그래디슨(Charles Gradison Finney 1792-1875)은 기독교를 비웃는 무신론자였으나 갈릴리 사람 예수를 대면하게 되어 복음을 전도하는 열렬한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성자 프랜시스는 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청소년 시기에 방탕의 길을 걸었지만 기도하는 중에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 생이 변하여 재산을 다 버리고 평생 가난한 사람을 위해 몸을 바쳤습니다. 영국에서 제일 존경받는 핵 학자 레이본(Cannon Raven) 교수는 그의 강의록 제 1집의 서문에서 “내가 최악의 생활 노정에서 침체 상태와 절망 상태에 놓여 있을 때 나는 살아계신 그리스도를 뼈저리게 느꼈다”고 하면서 이제는 격심한 의심은 사라지고 광명의 세계로 걷고 있다고 간증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이 빛에 접할 때 로마의 타락했던 교회가 새로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발견했고,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가 하나님의 빛을 보았을 때 스코틀랜드가 그 앞에 꿇었고, 웨슬리가 하나님의 빛을 받을 때 세계적으로 메소디스트 운동이 빚어졌고, 화이트필드가 하나님의 빛의 임재를 체험할 때 미국의 전 대중이 회개했습니다. 예수님의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영원불변의 진리임을 우리 생활 속에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요 8:12의 말씀에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하신 것은 과연 옳은 말씀인 것입니다.

4. 나를 따르는 자 끝으로 주님을 따르는 자는 (1)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합니다. 빛은 선과 무죄의 상징이요, 어두움은 죄와 불의의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빛은 친국을 상징할 수 있으며, 어두움은 지옥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한다는 말씀은 예수와 동행하는 자는 원수 마귀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마 4:2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의의 태양이기 때문에 태양이 비치는 곳은 밝아 어두운 그늘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단의 정죄, 어두운 죄의 그늘은 예수를 따르는 자에게는 주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참된 생명은 영생을 요청합니다. 아니 영생을 요구함이 아니라 참된 생명이 곧 영생입니다. 참된 생명은 영생이신 예수만으로 얻기 때문에 예수 없이 참 생명은 없는 것입니다. 왜 예수만이 참된 생명이요 영생이겠습니까 요 5:26의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생명을 있게 함이라”하신 말씀대로입니다. 예수만을 소유한 생명이 참된 생명이요 영생입니다. 각 분야의 진리는 다 있을 것입니다. 전쟁에도 진리가 있고, 과학에도 진리가 있고, 도덕에도 전리가 있고, 다 진리가 있을 것입니다. 생명의 약속의 역사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에서만 참 진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예수님을 모시고 참된 생명을 얻어 주와 함께 빛 속에서 영생을 바라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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