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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순례자의 생활 (히 11: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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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저자는 역대 신앙 용사를 「나그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여기서 나그네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여행자가 아니고 순례자라는 의미입니다. 벧전 2:11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마땅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자”는 구절에도 나그네라는 말씀이 있는 바, 이 역시 분명하게 순례자라고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들을 바울은 빌 3:20에서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자”고 일컬었던 것입니다.

1. 나그네는 언제든지 본향을 사모합니다 16절에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사모한다라는 말은 손을 내밀어 취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인은 미국 유학시절에 1년간 미국에서 생활해 보았습니다. 참으로 지상 낙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얼마안가 본국이 그립고 향수병으로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여기에서 나그네는 언제나 마음을 고국에 두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순례자는 보통 유랑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목적이 있는 여행자이며 특히 거룩한 목적,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성지를 순례하는 여행자입니다. 오늘 우리 기독교인 중에 예루살렘 성지의 순례자가 많습니다. 회교에는 메카성을 향하여 순례하는 자가 많습니다. 믿는 사람은 마치 이런 순례자와 같은데 순례자가 거룩한 땅을 순례하는 것처럼 믿는 사람은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순례자로써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기독교의 역사가 지니는 순례자들의 역사라는 것을 우리는 쉽게 발견합니다. 아브라함은 나이 75세에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고향을 버리고 떠날 때 조금도 쉬지 않고, 서슴치 않고 알지 못하는 세계를 향해 정처 없이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일생을 장막 생활을 하며 나그네 생활을 했습니다. 그의 생은 정말 순례자의 길이요, 모든 순례자의 역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였던 것입니다. 모세의 40년 광야생활 또한 순례자의 길입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과 이세벨을 피하여 멀리 호렙산까지 순례의 길을 걸었고, 세례요한 또한 그의 일생이 순례자의 생이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나사렛에서 자라, 복음을 외치기 시작하여 십자가에 매달리시기까지 3년간의 전도생활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일 곳이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스스로 증거 하신 것과 같이 말할 수 없이 외로운 순례자의 생활이었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믿음으로 집을 떠나 거룩한 생활을 한 순례자의 생활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성 안토니오라는 성자는 부유한 집에서 자랐고 그 유산이 많아 자신도 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읽다가 한 부자 청년이 주님 앞에 나와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고 물었을 때 주님께서 “오히려 네가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는데 가서 네 가진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읽고 안토니오 청년은 “나는 성경대로 살겠다. 주님 명하신대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자기 재산의 일부만 누이들에게 좀 나눠주고 전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 자신은 수도자가 되어 마침내 아프리카 광야에 유리하며 성자의 생활을 보내었으니 그의 삶은 대표적인 순례의 삶이었습니다. 일대의 위인 콘스탄티노플의 대 설교가 크리소스톰은 황태후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콘스탄티노플에서 쫓겨나 야만족이 사는 이역에서 순례의 생활을 하였고, 아타나시우스는 정통적 신앙의 생활을 하기 위하여 다섯 번이나 추방을 당하여 야만족이 사는 지방으로 광야 순례의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종교개혁시대에서도 이러한 순례자는 칼빈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습니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여러 핍박을 받아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유리하면서 종교개혁 운동을 하며 순례의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17세기 무렵에 영국 교회가 로마 교회로 기울어지는 경향과 신앙의 자유를 구속하는 영국 국교를 상대로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투쟁하던 청교도들도 핍박을 피하여 먼저 화란으로 향하였고, 후에 1620년 103명이 메이 플라무어호를 타고 순례자의 생활을 계속하였던 것입니다. 진 젠돌프 백작이 세운 모라비안 교회 역시 순례자의 교회였고, 19세기 이래 동양과 아프리카, 그리고 남양의 전도를 위해 흩어진 선교자들도 역시 순례자들이었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이렇듯 긴 순례자의 역사입니다. 이런 기독교 전통과 마찬가지로 우리 신자도 신령한 의미에서 누구나 다 순례자입니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은 영어로 말해서 “The filgrim′s Progress” 말 그대로 번역하면 “순례자의 진로”라는 뜻입니다. 이 책은 기독교가 장망성을 떠나 천성을 향하여 나가는 도중에 웅덩이와 높은 산과 기타 여러 가지 괴로운 일과 시험을 많이 당하나 끝까지 싸우며 믿음으로 나갔다는 기록입니다. 참으로 신령한 의미에서 우리 기독교인은 이 죄악 세상을 떠나 진리의 세계로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는 순례자의 생활인 것입니다.

2. 나그네는 언제든지 본향에 올아갈 준비를 합니다 14절에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을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고 했습니다. 본향에 돌아갈 준비를 서두르는 외국의 여행자는 결코 그곳에 토지를 사고, 가옥을 사고, 좋은 농장을 사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 본향에 돌아갈 때 운반하기가 곤란한 것들입니다. 또한 본향에 돌아갈 준비를 하는 자가 자기의 손노릇하는 곳에다 크고 깊은 인연을 만들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언제나 본향 천국으로 돌아갈 몸이니 이 세상과 너무 깊은 인연을 맺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이 외국에서 돈을 많이 벌어서 본국에 돌아올 준비를 해 두었다가 공부를 많이 하여 대성해서 금의환향하게 되면 본국에 돌아와서도 환영을 받고 잘 지냅니다. 그러나 외국 생활에서 탕진해 버렸으나 모든 준비를 그곳에서 다 해둔 사람은 본국에 돌아와서도 잘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의 모든 생활이 천국을 위한 준비생활인 줄 알고 그곳을 위해 힘쓰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3. 타향이요, 외국인 현 세상은 결코 영주지가 아닙니다 13절에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대해 그들의 지상생활을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오늘 기독교 신자들도 이 세상에서 영주지가 없는 나그네요, 시민권 없는 외국인입니다. 우리 인생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 와서 50년, 70년, 80년씩 나그네같이 살다가 한 사람도 남김없이 다 되돌아가는 것을 역력히 지켜봅니다. 그러면서도 아직까지 대개가 이 세상을 영주지인 양 생각하여 영구히 살 준비만 하고 있습니다. 혹 민족이나 국가가 후손을 위하여 건설하고 아름다운 유업을 남겨주려고 합니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현세적 생활에 열중하고 내세를 망각해 버리는 것에 주의해야 합니다. 다윗은 대상 29:15에서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로 우거한지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본국을 향해 귀국하는 나그네들입니다. 나그네는 얼마동안 외국에 살다가 반드시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먼저 가고 나중 가는 시차는 다를찌라도 분명히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생이란 나그네인 것을 압시다. 나그네는 영주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영주지도 아닌 이 세상을 영주할 곳인 줄 잘못 알고 이 곳에 자신을 투자하지 맙시다. 본향을 사모하고, 본향에 갈 준비를 하고, 본향에 가서 잘 살 준비를 합시다. 고후 4:17절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이 본향을 사모하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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