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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표적이 안 보일 때 기도 (시 7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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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간혹 불가피한 재난을 당하여 무거운 고통이 눌리게 되면 흔히 우리는 깊은 회의에 빠지는 수가 있습니다. 이런 회의는 우리에게 깊은 정신적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이런 환란을 당할 때면 큰 믿음과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우리의 지혜요, 의무인 것을 본문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본문을 읽어 보면 시인의 고민하는 모습을 우리가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실로 이스라엘 백성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면서도 그들에게는 고난과 불행이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이 시의 내용이 얼마나 심각한 민족적 고난을 표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이 시가 씌어진 그 시대적, 역사적 현실을 이해하고 나면 아주 분명히 들어나게 됩니다. 유대는 바벨론에게 BC 586년에 망했고, 바벨론은 파사 왕 고레스의 손에 의하여 패권을 잃게 되어 유대인은 고국에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파사의 지배를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후 다시 역사는 바뀌어 헬라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세계를 정복하면서 팔레스틴 지역도 헬라 제국의 지배하에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연속되는 식민지 생활 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독립운동을 일으켜 싸웠지만 번번히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지배자들은 유대인들의 그런 반발을 무마하기 위하여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지어주고 부락마다 회당을 지어서 종교 생활에 대해 자유를 주며 유화 정책을 폈습니다. 그후 알렉산더 대왕이 죽자 통치자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는 아주 잔인무도한 폭군의 기질을 유감 없이 발휘하여 유대 백성들의 자치권을 용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결과 성전을 훼손시키고 회당들을 많이 파괴하고 불태운 것입니다. 가장 악랄한 수법으로 성전을 모독하고 더렵혔습니다. 성전을 우상으로 대치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 대신 헬라 문화를 상징하는 주연을 베풀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국의 예루살렘 성전이 훼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온산의 예루살렘 성소를 기억하면서 이러한 노래를 한 것입니다. 원수들의 말발굽에 산산히 짓밝힌 조국의 도성과 성전이 약탈된 참상을 보고 들을 때, 시편 기자는 마음 속 아픔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이 원수들을 도구로 쓰셔서 이런 것이 허락된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며 이런 고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절에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라는 이 기도는 마치 주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십자가 상에서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부르짖으신 기도를 연상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도 극한 환란 속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하고 부르짖게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신실하신 약속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심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롬 11:1에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시 37:24에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합니다.”라고 간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절대로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약해서 쓰러질 때도 있습니다. 인생 표적이 안보일 때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이 시인은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셨다고 선언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떠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시인의 호소를 통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는 것이 무엇보다도 두렵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나님께 호소하며 떼를 씁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애원하며 호소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본문에서 그들의 성들이 불타서 자기가 손해를 보고 육신적으로 고생하게 된데 대하여는 말하지 아니하고 오직 원수들의 침략으로 말미암아 성소와 회당이 불살라지고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히게 된 것을 가슴 아파합니다. 신앙에 대한 관심은 세상적인 어떤 관심보다도 우리 마음에 더욱 간절해야 하며 우리 생활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진다면, 모든 세상 문제는 문제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9절에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 우리 중에 아는 자도 없나이다”고 했습니다. 실로 절망 뿐이며 처절한 비관과 가슴 답답한 슬픔만이 남을 뿐입니다. 매우 심각한 상황입니다. 이같이 불행한 사태는 우리의 개인 생활 속에서도 경험되고 한 민족, 한 국가의 역사 안에서도 경험됩니다. 표적이 안보일 때는 앞이 캄캄한 시기입니다. 희망으로 향하는 문들이 모조리 폐쇠되고 오직 짙은 어두움만이 깔려있는 절망적인 상태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경험을 일제의 시대를 통해서 해보았고, 6·25공산당 남침 시절에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태평 세월이 아니냐고 할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하나의 착각에서 나온 결론에 불과합니다. 이런 종류의 압박이란 언제나 적그리스도, 무신론자에게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가지가지의 여건들이 우리의 삶에 보이지 아니하는 강한 속박을 주는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과학문명, 도시, 공해, 기계화, 등이 우리가 그처럼 신성시해왔던 인간의 지성소를 마음대로 짓밟고 파괴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교회도 상황의 노예로 전락해 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맑은 양심의 소리, 성실한 복음의 선포자로서의 기능은 극소화되어 가고 그 대신 인간의 감정적인 흥분, 돈으로 따지는 숫자노름, 외화를 자랑하는 부피의 자랑, 출세, 이권, 지배욕을 부채질해 주는 기복 신앙 등의 도도한 물결 속에 휩싸여서 흘러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교회의 상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표적이 안보이는 때는 우선 우리가 꿈을 상실했다는 증거입니다. 그것은 예언자도 없는 때라고 했습니다. 정의의 기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모두가 시대에 아부할 줄 알고 상황에 편승해서 이권을 추구하며 출세를 꾀하는 자는 있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고 정의를 추구하며 뜨겁게 인간을 사랑하되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아는 자는 매우 적다는 말입니다. 이 시인은 그러한 상황 속에서 마지막에 하나님께 호소하는 간절한 기도로 이 시를 끝맺고 있습니다. “이 가련한 백성의 생명을 길이 잊지 마옵소서…… 당신께서 맺어 주신 계약을 기억하소서 ‥‥‥ 가난하고 불행한자 당신의 이름을 찬양하게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이 기도는 옛날 시인의 기도일 뿐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은 어려운 일이 있을지 모르나 궁극에 가서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소망 가운데 사시기 바라며, 오늘 이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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