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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금같은 신앙으로 시련 극복 (욥 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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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시인 테니슨은 “욥기는 고금을 통하여 가장 아름다운 시편”이라 하였고, 역사가 칼라일은 말하기를 “욥기는 인간의 손으로 쓴 책 중에 간장 장대한 책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욥기가 지혜문학 작품으로 성서적 가치를 지닌 이유는, 욥기에는 인간의 고뇌와 고통의 문제해결을 위한 심오한 철학과 빛나는 신앙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고난당하는 인생이 어떻게 그 고난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인생이 고통을 당할 때 어떠한 신앙자세를 취해야 할 것입니까 더 나아가 의인이 받는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입니까 고금을 통하여 욥기보다 더 명확하게 가르쳐주는 책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욥기를 통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이 고통을 당할 때 어떤 철학과 어떤 신앙으로 극복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고뇌와 고통에 못이겨 자살하는 사람에게도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으며, 고통을 피해 보려고 타락의 길을 택하는 자들에게도 자기 철학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고통을 당할 때 유치한 방법으로 해결하려 하면 그 사람의 인간 가치는 여지없이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돈이 없어 남의 물건을 훔쳤다는 사람, 살기 위하여 정조를 팔았다는 여인, 가난을 벗기 위하여 남을 죽였다는 살인강도, 이런 사람들의 생의 가치는 금수의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고통과 고난을 고상한 철학과 믿음으로 극복한 사람들의 삶은 값비싼 진주처럼 아름답고 가치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욥이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어떻게 극복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봄으로써 좋은 생의 교훈을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욥은 축복으로 받은 소유를 다 잃어버리는 고통을 받았습니다 욥은 하루 아침에 온 재산, 자녀, 건강, 부인 등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재물과 자녀는 의인이 받는 보상입니다. 시 128:1-3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를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볼 때 욥은 지금 의인이 받는 보상이 아니라 죄인이 받는 참혹한 심판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욥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롭게 살아가려고 힘쓰는 중에 의인의 보상을 받지 못하고 죄인의 심판을 받게 될 때 그 아픔은 더욱 크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소망을 가져보십시오. 욥은 그 가운데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인내함으로 승리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위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2. 욥의 친구들이 욥을 더욱 번뇌케 했습니다 욥에게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라는 세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고통과 고뇌에 처한 욥에게 우정어린 대화로써 위로는 해 주지 않고 그들의 교리, 신조, 경험으로 욥의 고통을 각각 자기 나름대로 해석했습니다. (1) 엘리바스는 가장 나이 많은 사람으로서 그가 체험한 것을 토대로 욥의 원인을 해석하고 있습니다. 욥 4:7-9에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데 악을 밭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기운에 멸망하고 그 콧김에 사라지느니라”고 했습니다. 엘리바스의 주장은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바로써 욥의 고통은 죄값이 틀림없다는 것입니다. 욥 4:17에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했느냐”라고 했습니다. 즉 욥이 받는 보응은 죄인의 보응이지 결코 의인의 보응이 아니라는 결론입니다. (2) 빌닷은 전통주의자였습니다. 그는 모든 사건을 과거의 전통에 비추어 설명했습니다. 사실 욥 이전에 의인이 욥처럼 고통을 당한 일이 없었습니다. 창세기의 에녹은 하나님과 일생을 동행하여 장수의 복과 죽음을 보지 않고 승천하는 복을 받았으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그의 후손이 하늘에 별처럼 땅에 모래처럼 창대하고 번성하게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런 인과응보의 사상은 구약 성서에 나타난 하나의 전통적 사상이었습니다. 이런 웅보사상의 전통적 신앙에 비추어 볼 때 욥의 고통은 죄인이 받는 고통임에 틀림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빌닷은 욥에게 회개하라고 권면했습니다. (3) 친구 소발은 교리주의자였습니다. 교리적으로 볼 때 욥의 고통은 틀림없이 죄값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인이 이런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욥 11:11에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치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정확하셔서 그의 하는 일이 틀림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욥의 고통은 죄값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욥의 친구들은 그의 고통을 해결해 주기는 커녕 오히려 욥을 미궁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욥은 징계받을 죄인이 자신이 아님을 확인하면서도 한편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3. 욥의 고통의 절정은 하나님의 침묵에 있었습니다 (1) 욥은 확고한 인생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욥 1:21에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아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인생의 사는 목적이 재물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나의 삶의 주제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시지 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것을 잃었다는 생각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것을 취하셨다는 생각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 날 인간들은 소유욕 때문에 생의 고통을 더욱 느끼고 있습니다. 욥처럼 나의 모든 소유는 하나님의 것이요 우리가 다 공수래 공수거의 인생에 지나지 않은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때, 소유의 상실이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2) 욥은 확고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욥 23:10에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했습니다. 욥은 자신이 받는 고통을 죄값이나 인과보응으로 생각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시련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욥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욥을 사랑하기 때문에 지금 연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고통에서 도피하려고 노력하지 아니하고 고통을 받아들이면서 그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과 더 접근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도가 시련을 당할 때 취할 바 신앙자세입니다. 롬 8:28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통 속에는 반드시 섭리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섭리는 인간이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믿고 순종할 때 그 고통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이제 욥은 모든 것을 회복했습니다. 재물의 축복을 갑절이나 받았습니다. 장수의 축복도 받았습니다. 욥이 받은 축복과 은총 가운데 더욱 큰 것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입니다. 욥 42:5에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고난과 시련을 믿음으로 극복하는 자는 그 아픔과 눈물이 변하여 기쁨과 행복이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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