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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야곱의 하나님 (시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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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20편은 다윗 왕이 암몬과의 전쟁 때(삼하 10장) 작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하여튼 여기에는 전쟁과 같은 격렬한 인간생존 면에서 체험되는 신앙이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시 20편의 내용은 1-5절에서 전지에 나가는 왕을 위한 백성의 기도가 나타나고, 6-8절에는 왕이 승리하리라는 제사장의 응답이며, 9절에는 백성과 제사장이 같이 부르는 송영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시 20편의 내용을 자세히 읽을 때 우리의 시선을 끄는 것은 여기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들입니다. 즉 1절에 야곱의 왕이란 이름으로 시작하여 5절에는 우리 하나님 그리고 7절에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는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고 성숙해져가는 자취를 말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가령 자식이 아버지를 부르는 칭호도 다양합니다. 어릴 때는 “아빠”라고 합니다. 성장하면 “아버지”라 합니다. 그 외에 부친, 엄친 등의 이름도 있습니다. 이런 이름의 변천은 아버지 편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 편의 변화와 성장을 말합니다. 시편 20편은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정연한 의식 시에 속합니다. 그러나 의식으로 끝나는 시가 아닙니다. 이 시 속에는 생동하는 체험이 있고 신앙의 성장이 있습니다. 이같이 생동 없는 의식은 무의미하고 의식 없는 신앙은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본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따라 우리 신앙도 깊어지고 성장해 가기를 바랍니다.

1. 야곱의 하나님입니다(1절) 그것은 역사적인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야곱은 태어나면서 세상 떠날 때까지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여러 번 실수도 했으나 하나님을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야곱의 일생 중 그의 벧엘의 경험은 특히 인상적입니다. 그는 형을 속여 장자 명분을 빼앗았고 아버지를 속여 형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이로 인해 형의 칼을 피해 고향을 떠난 들판 벧엘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하늘과 땅이 닿는 사닥다리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 벧엘의 경험은 그 후 야곱의 일생을 지배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란 역사적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그 후의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 선민의 조상으로 확립하게 하였습니다. 현대 독일의 신학 논쟁은 성서의 진리를 믿으면서 역사성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소위 비신화론을 주장합니다. 여기에 찬반의 논쟁이 심합니다. 성서의 역사성을 거부하고는 진리가 유지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즉 그리스도교 진리가 허위 위에, 창작품 위에 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반드시 역사를 조성하고 역사에는 반드시 진리가 계시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야곱의 하나님에서 역사적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를 믿는 것이 신앙의 기초가 된다고 믿습니다.

2. 우리 하나님입니다(5절) 그것은 우리 생활 속에서의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파스칼은 그의 팡세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그리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구, 신약에서 나타나는 역사적 하나님의 계시에 동참해야 되겠습니다. 하나님은 먼 역사적 하나님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에서 “우리 하나님”이 되십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살아계십니다. 수 24:15에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여호수아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생활 속에 신앙을 견지하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현대인들에게 돈이 하나님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배금사상이 현대인의 사고방식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또 현대인에게는 인간 또는 과학이 하나님이 되고 있습니다. 거대한 과학적 성취를 이룩한 현대인은 어쩌면 자아 두취에 빠져 있는지 모릅니다. 그 외에 현세적 향락 또는 섹스가 현대인의 숭배의 대상이 된 것도 봅니다. 하여튼 고대 로마나 헬라인들이 다신교에서 여러 신들을 숭배한 것처럼 현대인들도 보이지 않는 여러 신들을 섬기며 사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사회에 살면서 우리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며 살아야 합니다. 지상낙원이라는 스웨덴은 세계 그 어느 나라보다도 사회보장이 잘 되어 있고 세계 학자들이 부러워하는 노벨상을 주는 국가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오늘날 공산세계나 자유세계가 해결하고자 하는 사회문제가 모두 해결된 나라입니다. 그러나 스웨덴인의 정신적 자세는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무기력한 상태라고 합니다. 성도덕은 극도로 타락하여 성문제로는 어떤 일도 죄가 되지 아니하며 문제도 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휴일이면 젊은 사람이 강변에 종일 앉아 술을 마신다고 합니다. 서로 대화하기를 꺼립니다. 스웨덴은 종교개혁 때만 해도 개혁신앙에 선봉으로 섰으며, 신앙으로 살아왔고, 신앙으로 큰 축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들 생활 속에서 이제 하나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을 본문처럼 그들 생활 한부분으로 간직하고 생활합니다.

3. 여호와 우리 하나님입니다 현재 생활 속에서 체험하는 역사적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시 68:19에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라고 하셨고, 마 28:20에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생활 속에서 우리 주님의 임재를 느끼며 주님의 도우심을 체험합니다. 청교도 시인 테니슨은 “주께서 내 손바닥보다 가까이 계시고, 나의 호흡보다 가까이 계시도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신앙 섭리 과정도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생활 속에서 마치 집을 건축하는데도 “야곱의 하나님”이란 역사적 하나님을 그 기초로 마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하나님”이란 우리 생활 속의 하나님으로 그 기초 위에 집의 골격을 마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란 체험하는 하나님은 그 집의 내장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들이 주는 과정은 취사선택할 문제도 아니며 서로 균형을 이룩하여야 됩니다. 우리가 확고한 신앙에서 살며 주를 의지하고 살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이것은 신앙인이 차지할 수 있는 생의 결실이요, 영광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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