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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의 개조 (민 3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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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여러 사실 중에서도 이 출애굽의 기록은 특별히 많은 의미를 내 포하고 있습니다. 사실 출애굽의 40년이라는 세월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무척 긴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면 왜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였을까요 시내산 기슭에서 가나안 남방인, 브엘세바까지 200리 남짓한 노정인데 직로로 가자면 아무리 천천히 가더라도 2-3주일 정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동경하며 가는 때에 하루라도 속히 도달하고 싶지 않을까요 그런데 어찌하여 40년이나 긴 세월을 광야에서 헤메였을까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신비한 경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훈련하시고자 하였습니다. 가나안 복지는 그에 합당 한 자격을 갖춘 자라야 소유할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도 쉬임없이 영적인 가나안 복지를 동경하며 가는 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길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역시 가나안 복지를 누릴만한 그 무엇이 갖추어 있어야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는 그 백성으로서 누릴 자격이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모습으로는 가나안 복지의 백성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복지에 거할 백성을 기르기 위하여 그들을 개조하실 필요가 생겼던 것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애굽에서 나온 무리를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20세 이하의 사람만 그 복지에 들어가게 하였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20세 미만자는 그 성질을 개조하기 가능한 자들만을 의미합니다. 가나안 복지를 누릴 백성은 애굽에서 나을 때 20세 이상된, 죄악에 젖은 자 가 아니고 새로이 광야에서 훈련받은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렙과 여호수아는 20세가 넘어도 가나안 복지에 잔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죄에 젖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애굽에 노예 되었던 자로써 자유민의 경내에 들어가자면 많은 훈련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곧 노예적 근성이 뿌리박힌 인간을 개조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인간성을 개조하기에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요한 것입니다. 홍해가 앞에 닥칠 때 애굽의 노예생활을 다시 생각하며 양식이 핍절할 때 애굽의 고기가마를 생각하는 것 같은 노예의 상태에 있는 백성이 어찌 가나안 복지의 이상적 왕국의 백성이 될 수 있겠습니까 노예의 근성이 박힌 자에게 자유의 왕국은 당치 않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중은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예속성을 가진 인간을 개조하지 않고는 가나안 복지에 허락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을 성도라고 합니다. 성도는 율법의 노예에서 제도나 의식의 노예에서, 악마의 노예에서 벗어난 자라야 합니다. 그 본성까지도 없어진 자라야 참 성도라 하겠고 가나안 복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광야의 40년은 애굽에서 노예 노릇하는 근성이 남아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그 개성들을 개조하기 위하여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광야에서 방황하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부수적인 목적도 따랐습니다.

1. 사회적 단결심이 없는 그 민족의 인간성출 개조하시려고 한 것 입니다. 처음부터 이 민족의 출애굽운동은 무력으로 대항하던 군비운동도 아니 요 금력으로 일으킨 경제운동도 아니었습니다. 200만 대중이 일시에 단합해서 민족적 단결에서 일어난 큰 세력 있는 운동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단결에서 일어난 운동이면 극히 적은 부분에서라도 그 단결을 떠나는 때에는 그 전체운동은 힘이 없어지며 와해될 것이 정한 이치입니다. 각 지파를 대표한 250인의 반역운동이라든가, 열 두 명의 정탐꾼 보고 같은 것이 이 민족의 단결을 파괴하는 것이며, 이렇듯 이 단결할 줄 모르 는 백성들이 이상적 왕국의 주인공이 될 이치가 만무합니다. 그런 까닭에 이 단결할 줄 모르는 인간을 개조하시기 위하여 40년이나 광야에 두신 것 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가나안 복지를 동경하는 자입니다. 우리의 교회 또는 개인의 생활이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를 동경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그 복 지의 백성이 될 만한 단결력이 갖추어 있는 자친가를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2.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여호와로 알기는 알았으나 그 실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떠난지 오래였습니다. 이 하나님을 떠나서 살고자 하는 인간을 개조해야 될 필요에서 40년을 광야에 헤메이게 한 것이었습니다. 곧 저희의 하나님은 두뇌로만 아는 하나님이었고, 마음과 정으로서 관섭되는 하나님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두뇌로서만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 내가 심정으로 관계를 맺는 때에 하나님은 나의 참 실제생활에도 관계가 있는 하나님이 되시며 생활의 최고 이상을 관철해 가는 데도 능력이 되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탄식하던 바와 같이 인간의 성품에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는 선한 성품도 있으려니와 하나님을 떠나서 악에 거하려는 성질이 더 많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는 내가 곤란할 때에만 이용할 신이 아니시오, 참 나의 주 가 되시며 왕이 되시며, 아버지가 되시며, 능력이 되시사 나의 모든 생활 에 내적으로 외적으로 온갖 것을 다 지배하시는 왕이 되어 계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을 가르치시고 개조하시고자 하는 의미에서 40년을 방황하게 하였습니다. 인간은 개조하여야 합니다. 노예적 근성을 가진 인간을 참 자유의 인간으로 개조하여야 합니다. 단결할 줄 모르는 인간을 하나님을 떠나고자 하는 인간을, 참 가나안 복지의 이상적 왕국의 백성이 될 만한 자격이 갖추어져 있는 인간성을 가진 인간으로 개조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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