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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물에서 건지시는 하나님 (시 11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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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읽을 때마다 언제나 새로운 뜻을 깨닫게 해주곤 합니다. 오늘 읽은 말씀 중에 서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 눈을 눈물에서 건지셨다”라는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는 그 어느 때 보다도 피부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한동안

5.16광장, 여의도 광장이니 하던 그 곳이 이제는 만남의 광장이 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봅니다. 몇 년 전 TV로 헤어졌던 이산가족들의 재회의 장면을 보면서 저들의 눈에서 흘러내리는 짙은 눈물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이 시편 기자의 기도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그동안 얼마나 기도를 했겠습니가 만나게 해댈라, 찾게 해달라고 얼마나 눈물로 기도했겠는가 말입니다. 이들의 간절한 기도로 40년 가까이 생사조차 모르고 살던 혈육들이 꿈이 아닌 현실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목을 안고 우는 모습을 보노라면 누구나 울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내 눈을 눈물에서 건지셨나이다”라고 하는 말씀을 다시 한번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은 물에서 태어나서 눈물로 떠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눈물을 제거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 바로 인간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은 눈물 속에서 살 수밖에 없고 그 눈물을 제거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면 이 “눈물에서 나를 건지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깊은 의미를 주는 말씀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눈물을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그 눈물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56:8에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주소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흘리는 눈물 중에는 주의 병에 담기울 눈물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와 통회하고 자복하여 흘리는 문물, 어둠의 세상에서 빛의 자녀로 살다가 도전과 모함과 핍박과 박해 속에서 흘리는 문물, 의를 위해 고난당하면서 흘리는 문물,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기도를 드리며 흘리는 눈물, 이런 눈물은 모두 “주의 병에” 담기울 눈물인 것입니다.사도 바울은 고후 4:8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들의 환경은 한마디로 답답함과 우겨 쌈과 핍박과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그런 현실 속에서도 그런 자리에서 마아하지 아니하고 건져냄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즉 눈물에서 건져냄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눈물의 자리에서 방황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내 눈을 눈물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물질의 실패로 눈물 속에 있는 이들이 계십니까 더 큰 물질을 관리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하여 고기잡을 그물과 배를 버리게 하시는 뜻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진정 하나님을 받는 성도들의 눈에서 하나님은 그 눈에 눈물을 씻겨 주실 것입니다. 내 눈을 눈물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늘도 살아계셔서 역사를 주관하시고 개인의 생사회복을 손에 쥐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언젠가 꿈꾸는 것과 같은 통일의 날을 주실 줄 믿습니다. 바로의 마음을 강팍케 함으로 출애굽의 역사가 이루어지게 했듯이 북한 공산당들의 마음을 점점 더 강팍케 함으로 통일의 날을 단축시키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눈에는 눈물을제거해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오늘도 또 하루를 소망 가운데서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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