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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의 덕행 (히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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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말과 이론의 종교가 아니라 실천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아느니라”(요일 3:18-19)고 했습니다. 또 사도바울은 고전 13:2에서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고 했습니다. 또한 약 2:26에서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였으며, 주님께서 마 7:23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 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여 기독교의 생명은 신앙이요 행실은 신앙의 광채인 것을 말씀했습니다. 본문에 교인의 다섯 가지의 문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1. 형제 사랑 1절에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라고 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라는 것은 우리 기독교의 신앙과 도리의 기초 원리인 줄 압니다. 이를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므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일 3:14). “누구든지 형제를 사랑치 않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하느니라.” (요일 4:20-21)고 하였던 것입니다. 즉 사랑과 생명의 하나님은 분리할 수 없는 것을 강조하고 기독교의 총화는 사랑 곧 형제를 사랑하는 데서 그 독특함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형제도 원수가 되기 쉽고 하나님을 모른다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면 생명은 약동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사 하늘의 축복을 땅에서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오실 때까지 세상에서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할 뿐더러 천상에서도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해야 합니다.

2. 손님 대접하는 친절 2절에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대사회에서는 손님에 대한 친절이 존중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 세상에서 축복받는 길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의 첫 번째로는 손님을 대접하고 병자를 방문하는 것을 들고 있습니다. 희랍 사람이 즐겨 쓰던 제우스신의 칭호는 제우스 크세니오스(Zeus Xenios) 즉 여행자의 신이었습니다. 여행자와 몸 둘 곳 없는 손님은 신들의 왕인 제우스신이 돌본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고대사회는 손님 대접하기를 즐겨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손님대접을 즐겨한 것은 다른 의미로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의 사회에서는 여인숙과 기생집을 동일시했습니다. 그곳은 비싸고 도덕적으로 윤락행위가 성행했던 곳입니다. 그런 사회에서 접대는 크리스찬 사이에 필요했던 것입니다. 돌아갈 집이 없는 노예, 순회하는 설교자와 예언자들이 여행하는데 숙박비도 비싸고 도덕적 분위기 자체도 말이 아니어서 기숙하는데 힘이 들었습니다. 기독교인은 이런 이들을 접대해야만 했습니다. 기독교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는 종교입니다. 본문에서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일이 있다 했는데 아마도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와서 이삭의 탄생을 알린 천사라든가(창 18:1). 삼손의 아들의 탄생을 마노아에게 고한 천사의 일(삿 13:3-)을 가리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 전도자들은 무전 전도여행을 했었으니 이들을 대접하는 손이야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굶어서라도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는 전도자들은 일선에서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고 우리는 그들을 대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손님 대접하기를 오늘에 그치지 말고 일평생 잊지 말 것입니다.

3. 옥에 갇힌 자를 생각할 것 이것은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 곧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 같이 하라는 것에 해당하는 구체적인 것입니다. 자기도 몸을 가졌으니 남의 몸이 상하면 자기 몸이 상할 때의 아픈 감정을 생각하고 남이 옥에 갇혔으면 자기 몸이 갇힌 것 같이 옥중고를 느끼며 동정해야 할 것입니다. 몸이란 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을 주고 사신 예수의 몸 된 교회를 가리킴이니 교회의 성도들은 이웃이라기보다는 같은 지체인 것입니다. 손끝이 바늘에 찔리면 온몸이 자극을 받는 것과 같이 형제가 고생을 받고 학대를 당하고 혹은 옥에 갇히면 자기가 당하는 것과 같이 생각하여 동정하라는 말입니다. 마 25:34-40에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한 바라 내가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너희가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나에게 한 것이니라”하신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4. 순결한 생활 4절에 “혼인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고 했습니다. (1) 당시에 결혼을 경히 여기는 금욕주의가 성행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순결을 지키기 위해 거세를 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오리겐 모부도 그 중의 한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런 금욕주의를 배격하고 결혼을 귀히 여기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2) 간음하는 자들과 음행하는 자들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이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초대교회의 우리 신자들은 그 생활이 순결하여 기독교를 박해하던 자들도 자기 배필이나 자부를 맞이할 때는 기독교인 가정의 여성을 원했습니다. 초대교회의 기독교도가 사회에 보인 순결의 모범은 기독교를 비난하고 멸망시키려고 했던 사람들까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5.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5절에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하셨습니다. 돈을 사랑치 말라는 말은 돈 자체를 무시하거나 돈을 벌기위한 노력을 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기 위하여 돈을 벌어야 하고, 주의 사업을 하기 위하여 돈을 많이 모아야 할 것입니다. 돈은 인생생활에 필수적인 것입니다. 한강 밑에서 깡통을 들고 얻어먹으며 사는 사람들은 이목구비가 남과 같지 않아서도 아니요, 인격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오직 돈이 없어서 그러한 것입니다. 돈만 있으면 그들도 양옥 집속에서 남들같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황금만능주의로 금전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음의 경우는 부도 하나님의 축복이 됩니다. (1) 탐하지 아니하고도 부하게 되었다면 이는 축복일 것입니다. 부자가 되려고 노력한 바 없고, 조급히 부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으며, 부자가 되려고 부정한 일도 하지 않았고, 부자가 되기 위해 만신창이가 된 일이 없는데도 부자가 되었다면 이런 부는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성경은 부자가 되기 위해 힘쓰기보다는 옳고 바르게 살기위해 힘쓰라고 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런 성경의 가르침대로 정직하고, 근면하고, 검소하고, 절약하고, 성실하게 사는데 부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부러워해야 할 부인 것입니다. (2) 근심하지 않고도 부를 얻었다면 그것은 축복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부정과 상관없이 얻은 부가 흔하지 않은 것처럼 근심과 상관없이 이룩한 부 역시 희귀한 것입니다. 사람은 흔히 삶의 고난 때문에 삶의 감격을 상실하기도 하며(마 6:25), 세상의 재리와 염려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기도 하며, 부 하려는 근심 때문에 자신을 해칠 때도 없지 않습니다(딤전 6:10). 부는 근심의 소산이어서 부가 더해질수록 근심도 또한 정비례하기 마련입니다(눅 12:17). 그러나 근심, 걱정 없이 부를 얻었다면 잠 10:22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근심 없이 얻은 부는 부러운 부인 줄 압니다. (3) 하나님께로부터 얻어진 부는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창 24:35의 아브라함의 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창 26장의 이삭의 부도 하나님께서 주신 부입니다. 저들의 부는 비자를 짜듯 억지로 짜낸 부가 아니라, 비처럼 위에서 내려주신 부였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저들은 부하기 위해 자신과 이웃을 해칠 필요도 없었고, 부해졌기 때문에 자신과 사회를 손상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저들의 부는 축복임에 틀림없습니다. 부는 덮어놓고 저주 시 할 것도 못되나, 부를 덮어놓고 부러워 할것도 못됩니다. 모든 부가 저주가 아닌 것처럼, 모든 부가 다 축복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탐심 없이 이룩한 부, 근심 없이도 유지되는 부, 하나님께로부터 온 부만이 축복인 것입니다. 그리고 부가 위와 같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루어졌을 때에만 나와 남에게 유익한 것이 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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